지난해 12월부터 판매를 시작한 로또 복권의 판매액은 19일 기준(20회차)으로 1조2,178억여원. 1회차 판매액 36억원에서 출발, 10회차에서 1등 당첨금이 3차례 연속 이월되며 2,608억원까지 치솟기도 했다. 지금까지 1등 당첨자는 모두 47명. 이들은 평균 60억800만원의 당첨금을 받았다. 1등 최저 당첨금은 13억원으로 같은 1등이라도 30배 차이를 보인 셈. 일부 당첨자의 미담도 화제가 됐다. 인천에 사는 L씨는 1등에 당첨돼 당첨금 90여 억원 가운데 10억원을 기부했고 울산에 사는 40대 회사원도 2등 당첨금 3,100만원 가운데 1,000만원을 직장동료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뇌척수염을 앓고 있는 어린이에게 기증했다. 하지만 로또 복권의 최대 수혜자는 누가 뭐래도 정부. 총 판매액 중 당첨금 6,000억 여 원과 각종 수수료를 제외한 나머지 판매액을 고스란히 독식했다.'407억원' 대박의 사나이를 찾으러 간 17일, 강원 춘천시는 후터분했다. 이른 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내 전체가 미열에 달떠 있었다.
춘천역에서 택시에 오르자 아니나 다를까 기사가 로또 복권 얘기를 꺼냈다. "나올 수 있는 조합이 모두 800만 가진데 19회까지 나온 조합을 분석해보니까 말이에요…저는 개인적으로 홀수와 짝수 비율로 조합을 정하는데…." 매주 2만∼3만원씩은 꼭 복권을 산다는 기사의 당첨 노하우 설명은 한 참 계속됐다. 기자는 그 내용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P씨 근무 경찰서 확인전화에 몸살
P씨가 근무했다는 경찰서에 들어섰다. 쉴새 없이 울리는 전화벨에 파묻힌 P씨 동료들은 난감함과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 글쎄 우리도 몰랐다니까요…우리가 왜 숨겨요, 그걸.", "어제 사직서 내고 연락 안되죠. 월급이요? 수당 합쳐서 한 200만원 넘을려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이냐"는 확인·문의 전화에다 혹 P씨의 소재를 알면서 가르쳐주지 않는 것 아니냐는 채근까지. 전날까지 얼굴 맞대고 근무하던 이가 수백억원대 갑부가 됐다는 사실도 믿겨지지 않은 이들에게 여기저기서의 확인 전화는 이른 더위 못잖은 짜증을 안기고 있었다. 선풍기 돌지 않는 사무실에선 손 부채질만 바빴다.
전날 사직서를 제출하고 종적을 감춘 P씨는 직장 동료 누구에게도 복권 당첨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직속상관과 동료는 갑작스레 사직서를 들고 나타난 그를 붙잡고 한참 설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P씨는 "다른 괜찮은 직장을 구했다"며 완강했다고 했다.
"사람 참,… 그런 사정이 있다고 얘기하면 누가…." 한 동료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섭섭함이 없지 않을 터. 허우대 좋고 서근서근했다는 P씨였으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다른 이들도 입을 열려 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질문을 바꿔봤다. "P씨는 지금 행복하겠죠?" 현관 앞에서 만난 한 P씨 동료는 겉웃음만 띄웠다. 그리고는 건물 현관을 장식해놓은 팬지며 패랭이, 며느리밥풀꽃 화분을 만지작댔다. "꽃이나 보고 있는 게 제일 행복하죠."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
풍문속 대박 주인공 줄잡아 10여명
호반의 도시 춘천은 지난 한 주간은 로또의 도시였다고 한다. 사상 최고액 407억원의 로또 복권 당첨자가 춘천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난 13일, 일요일부터라고 했다. 중앙로2가 가판대에서 복권을 사간 사람이란 것만 확인된 상황에서 '대박 주인공'의 신상은 사람들의 입과 입을 거쳐 만들어졌다가 지워지기를 거듭했다. 한 상인은 결과를 놓고 보면 헛소문인데 그 과정 자체가 기괴하기 그지 없었노라고 토로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미친듯했다"고 표현하는 이도 이었다.
일주일간 거론된 대박 주인공들은 줄잡아 10여명. 지하상가 옷 가게의 20대 여자 점원, 지하상가 20대 남자 배달원, 농부, 중앙시장 상인, 간판업자, 버스기사, 금은방주인, 춘천에 출장 온 회사원…. 이들이 지난 일주일간 춘천 시내를 유령처럼 떠돈 로또 대박의 주인공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중앙로 지하상가 20대 여점원의 소문은 꽤나 구체적이었다. '바로 다음날 옷가게를 그만 뒀고 가족들도 함께 사라졌다.' '부모가 모두 중병에 걸렸었는데 그 돈으로 바로 미국으로 치료하러 간다더라.', '협박을 받고 있고 곧 살인사건이 난다더라.'
한 가방 가게 주인은 섬뜩하기 조차한 연쇄 풍문을 "너도 나도 관심이 많은데다 자기도 한번 대박 주인공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들이 겹쳐져 만들어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소문들은 상가 사람들의 일손을 붙들어 매놓은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지하상가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강모(32)씨는 "불경기라 장사도 안 되는 판에 심란하다"고 했다. "괜히 마음 다잡기가 힘들었어요. 가게 사람들 중에 아마 이번 주에 로또 안 산 사람 없을 거예요." 한 40대 옷가게 여사장의 말이다.
대박 나온 복권가게 문전성시
로또 1등 당첨자를 낸 중앙로2가 가판대는 문전성시였다. 대박이 터진 바로 그곳이라는 플래카드가 1평 남짓 복권 가판대를 휘휘 감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없었다. 복권을 사지 않더라도 한참 서서 가판대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사람, "1등 나오면 판매점에도 보너스 준다면서요?"라며 호기심 어린 눈빛을 가판대 안으로 쏘아대는 사람.
오전인데도 쉰한살 판매점 여주인과의 대화는 좀체 이어지기 힘들었다.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로또 복권 판매는 추첨을 앞둔 금요일과 토요일이 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바로 코앞에서 실증된 '인생역전'에 매료된 복권 구매자들은 불나방처럼 요일 가리지않고 몰려들었다. 평균 판매량을 10배나 넘겼다고 했다.
서울에서 물어 물어왔다는 50대 남자가 차를 세워놓고는 들렀고, 청주에서 왔다는 40대도 10만원어치의 복권을 사갔다. 처음 로또를 해본다며 서툰 손놀림으로 번호를 채워넣는 20대 여성, 엄마 손을 잡고 온 초등학생…….
점심시간. 몰려나온 와이셔츠 차림 몇 명이서 한꺼번에 50만원어치 복권을 샀다. "이번에 자동선택으로 (1등이) 됐다니까 자동으로 해야지." 1등이 되면 먼저 뭘 하고 싶냐고 묻자 '집' '차' 등의 얘기가 나온다. 한명은 "절반은 사회에 기부할 것"이라고 호기롭게 답한다. 서울에서 왔다는 승복차림의 60대 남자도 복권을 사갔다. "스님도 복권을 하냐"고 묻자 "절 지을려고. 왜?"라고 쏘아붙인다.
대박이 나온 복권가게와 4차선 도로를 사이를 두고 바로 건너편에도 로또 판매점이 있다. 타격이 크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답이 나왔다. "폭탄 떨어진 데 또 떨어지는 것 봤어요? 많이 사는 '선수'들은 우리 가게로 와요."
복권가게 바로 옆 구두 닦는 가게. 50대 주인은 "손님들이 구두만 벗어놓고 복권가게로 향한다"고 했다. "하루 종일 이러구 있어야 겨우 몇 만원인데…솔직히 일할 맛 안 나죠." 늙은 구두닦이는 구두약 묻은 얼굴로 웃었다.
주말을 앞둔 인근 중앙시장 상인들도 모이면 복권 얘기였다. 생선가게를 지키던 상인은 "그 당첨된 경찰관이 남을 열심히 도와주는 좋은 사람이야. 그래서 하늘이 복 준 거야"라고 했다.
-아시는 분이에요.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해."
집 근처에서 뜯어온 돌미나리며 두릅을 내놓고 길가에 앉은 노파에게 만약 407억원이 생기면 어디에 쓸 것이냐고 물었다. "아이구, 아이구, 그 많은 돈을 어디다 써." 몇 만원 벌려고 버스 갈아타고 왔다는 노파는 이날 오후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몇 천원어치도 못 판 채 짐을 꾸려야 했다.
"어디 일할 맛 나겠어"상실감 만연
P씨가 살던 아파트를 찾았다. P씨가 대박의 진짜 주인공이라는 얘기가 가장 먼저 나온 곳이다. "서울 도곡동에다 벌써 집을 샀다던데요" "경호원 20명을 붙였다고 하던데요"따위의 소문들이 대박 주인공이 떠난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한 이웃은 "복권 당첨된 사람치고 끝이 좋은 사람이 없다는데…" 라며 사라진 이웃을 걱정하기도 했다.
아파트 단지 앞 상가에선 50대 중년 남자 몇이 비를 핑계로 술추렴을 하고 있었다. 낮인데도 벌써 얼굴이 불그레하다. "내가 평생 일해서 장만한 게 아파트 하나요. 그런데 그 돈이면 춘천시내 아파트를 다 살 수 있데." "그런 거 보면서 일할 마음이 나겠어." "로또 이거 무슨 수를 써야지. 돈이 돈 같지 않아." "땀 흘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왜 허탈해 하고 상실감을 느껴야 하는 거요?"
대답할 수 없었다. '인생역전' 한탕 꿈이 이어지면 상실감의 술추렴도 계속될 터였다.
/춘천=글 이동훈기자 dhlee@hk.co.kr
사진 일간스포츠 김민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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