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에서 위기에 빠진 민주당을 구한 것은 국민경선제였다. 국민경선제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 넣었고 언론들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개인적으로 1990년대 초반부터 3김의 사당정치를 비판하며 미국식 예비선거제 도입을 주장한 나로서는 국민경선제 열풍에 감회가 새로웠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사람들처럼 그 열풍에 감격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정당민주화의 진정한 시금석은 대선의 국민경선제가 아니라 2004년 총선이라는 주장을 폈다.그 이유는 한국정치의 심각한 문제인 사당정치의 핵심이 대통령후보 선출과정의 비민주성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92년 대선후보였던 김영삼 김대중씨, 그리고 97년 대선후보였던 이회창 김대중씨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당내 경선을 통해 후보로 선출됐다.
문제는 이들이 제왕적 대통령, 제왕적 총재로 변해 국회의원 후보 등을 밀실공천해 온 것이다. 따라서 국민경선제로 샴페인을 터뜨리기보다는 2004년 총선에서 각 정당이 국회의원 후보들을 민주적으로 선출하느냐를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불행하게도 이후의 사태는 나의 생각과 우려가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선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경선 덕으로 승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후보가 되고 나자 민주적 경선의 원칙을 내동댕이 쳐버리고 김영삼 전대통령을 찾아가 부산시장후보의 밀실 낙점을 부탁했다. 이어진 8·8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도 마찬가지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정당민주화의 대세에 따라 상향식 공천으로 바꾼 당헌, 당규를 무시하고 시간상의 제약 등을 핑계로 과거처럼 밀실공천을 했다.
며칠 뒤에 있을 4·24 재보궐 선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3개 선거구의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출마할 후보들을 다시 한번 당규를 어기고 중앙당에서 밀실공천을 하고 말았다.
특히 고양 덕양갑의 경우 민주당이 개혁국민정당의 유시민 후보를 돕기 위해 후보를 내지 않기로 중앙당에서 결정하면서 지역구 당원들의 격렬한 저항이 생겨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또 경기 의정부는 민주당과 한나라당 모두 개혁성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고 문제가 많은 지역학원재벌들을 공천해 선거가 학원재벌간의 잔치로 변질되고 말았다.
결국 지난 해 봄 국민경선제 열풍이후 치러진 두 차례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후보선출이 모두 이런 저런 핑계에 의해 정당민주화라는 시대적 요구와는 동떨어진 하향식 밀실공천으로 끝나고 만 것이다. 특히 이번 재보궐 선거의 경우 그 실망감은 거의 절망감에 가깝다. 지난 대선에서 나타난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적 열망에 놀란 정치권이 위기의식에서 당개혁을 심도 있게 논의해오고 있는 가운데서도 과거의 낡은 밀실공천을 전혀 개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이 이러하기에, 이대로 가다간 내년 총선에서도 낡은 밀실공천의 관행이 계속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물론 상향식 공천이 개혁적이고 바람직한 후보를 선출한다는 보장은 없다. 사실 지난해 8·8 재보궐 선거에서 민주당이 유인태, 장기표 등 재야출신의 개혁인사들을 공천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 개혁적인 유시민 후보와 연합공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향식 밀실공천 덕분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설사 비개혁적 인물이 뽑히더라도 민주적인 상향식 공천이지 개혁이라는 이름하의 밀실공천이 아니다. 이 점에서 4·24 선거는 그 선거결과와 상관없이 이미 낡은 정치가 승리하고 국민들이 패배한, 보나 마나인 선거이다. 이제 밀실공천의 시대는 끝나야 한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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