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은 정말 예쁘고 심성이 착한 아이였어요. 부모라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랬다. 주변 다른 이들도 그렇게 얘기했다. 초등학교에서 고교 때까지 줄곧 반장을 맡아 친구와 선생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외동딸은 원하는 명문대 법학과에도 거뜬히 들어갔다. 졸업반이 되면서는 "정의로운 법조인이 되겠다"며 사법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양가 부모에게 '공인'받은 남자친구도 있던 딸은 늘 주변을 밝게 만드는 아이였다.그런데 그 딸이 어느날 사라졌다. 그리고 열흘 뒤 공기총으로 끔찍하게 살해된 시신으로 발견됐다. 게다가 사자(死者)는 항변할 수도 없는 법. 아이를 둘러싸고 더러운 의혹이 덧씌워진 소문이 함부로 떠돌았다. 아버지는 피눈물을 쏟으며 다짐했다. 내 너를 앗아간 자들에게 반드시 죄값을 치르게 하겠다고. 그래서 한점 부끄럼 없는 네 모습을 되찾아주겠노라고. 그 후 필사적으로 범인 쫓기를 1년 한달여. 하모(사망당시 21세)양의 아버지(57)는 마침내 그 약속을 지켜냈다.
"후련하냐고요? 저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닙디다.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집념이 그나마 삶을 지탱해준 힘이었던 셈입니다. 딸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는 상실감이 더 커져 견딜 수가 없어요."
하씨가 죽어도 잊지 못할 그날은 지난해 3월6일이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집 인근 스포츠센터에 새벽 수영을 나간 딸이 여느 때와 달리 점심 무렵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는 본격적인 고시준비를 위해 얼마 전 휴학계를 내고 건강관리를 하며 이웃 독서실에 나가고 있었다. 스포츠센터, 독서실에서도 처음인 딸의 결석을 의아해 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혹시 뺑소니?' 그러나 그날은 아무런 사고도 없었다.
"그렇다면…" 퍼뜩 짚이는 생각에 강남경찰서로 내달린 시각은 오후 2시30분. 하지만 경찰은 심드렁했다. '요즘 세상에 딸이 몇시간 연락 안된다고 뛰어오는 부모가 다 있나?' "이 보시오. 우리 딸은 달라요. 지금껏 행적을 알리지 않고 이렇게 연락이 끊긴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소."
입술이 타 들어가기를 사흘 째 하씨는 언뜻 아파트 경비실의 무인카메라에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는 경악했다. 그날 새벽 어두운 아파트 입구를 나서는 딸에게 장정 둘이 달려드는 모습이 잡혔다가 사라졌고 잠시 후 승합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지나갔다. 납치다!
처음부터 자신의 처조카이자 딸의 이종사촌오빠인 김모(31) 판사의 장모 윤모(59)씨에게 혐의를 두었던 하씨는 현상금 1억원까지 제시하며 경찰에 절박하게 매달렸다. 그러다 딸이 사라진 지 꼭 열흘 뒤 경기 광주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차갑게 체온이 식은 자식을 대할 때의 부모 심정이 어땠으랴. "그냥 억장이 무너집디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병원 장례식장에서 하씨는 딸을 두 번 더 보았다. "믿기지 않을 겁니다. 입관(入棺) 전 아이가 분명히 눈을 떴어요.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도 떨렸고요. 아내도 똑똑히 봤다고 했어요. 내가 손으로 눈을 감겨주었으니까요. 착한 우리 딸이 엄마 아빠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려했던 건지…."
상황은 급반전됐다. 경기경찰청 강력계와 광주경찰서의 베테랑 형사들로 전담반이 구성되고야 비로소 수사다운 수사가 시작됐다. 그리고 4월 중순 하씨가 경찰에 건넨 명함 한장은 사건을 푸는 결정적 단초가 됐다. 전년 가을 사업얘기를 하자며 수상쩍게 접근하던 김모(40)의 것이었다. 그는 행방을 감췄으나 그와 관련된 인물들이 범행 도구를 사들인 사실 등이 드러났다. 사건 직후 김과 함께 황급히 출국한 윤모(41)는 바로 처조카의 장모 윤씨의 친조카였다. 이후 공범들의 신원이 속속 확인됐고 이들과 사돈 윤씨와의 금전거래 사실도 파악됐다. 사건의 전체 그림은 분명해졌다.
사돈 윤씨는 납치 등 혐의로 구속됐으나 정작 살인을 입증할 윤과 김이 달아나고 없었다. 하씨는 6월초 직접 베트남으로 날아갔다. "거기에는 윤의 동생이 사업을 하고 있어요. 위험했지만 잡다가 죽어도 좋다는 심정이었어요. 최소한 우리 힘이 미치는 인근 국가로 달아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씨는 그 곳 치안 책임자 등을 만나 읍소하며 현지인과 교민사회에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그러나 윤의 행적은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데려간 무술 유단자 등을 남겨두고 일단 하씨는 철수했다. 얼마 뒤 이들과 현지 군·경이 호치민 시내에서 윤을 확인, 은신처를 덮쳤으나 놓쳤다는 연락을 받고 땅을 쳤다.
가을에는 또다른 정보망을 깔아 둔 캄보디아에서 윤을 목격했다는 제보도 들어왔다. 현상금 5,000달러에 현지언론과 수배광고 게재협상을 진행하던 중 올해 1월 중국 교민에게서 귀가 번쩍 뜨이는 정보가 날아들었다. "윤과 김이 칭다오(靑島) 등지에서 위조 신분증을 갖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경찰의 협조요청을 받은 중국 공안도 인터폴 적색수배 대상인 이들의 추적에 돌입, 결국 이들 둘은 지난달 말 옌지(延吉)에서 체포돼 압송됐다. 경찰은 마침내 사건발생 13개월여 만인 이달 13일 당초 하씨가 짚었던 그대로인 사건전모를 발표했다.
이 동안 하씨의 가정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대기업 임원을 지내고 독립해 꾸려오던 회사일은 당연히 뒷전에 밀려났다. 쓴 비용만도 거의 1억원. 하씨는 병원치료를 받아가며 매일 폭음과 수면제로 버텼다.
무엇보다 아내의 비통해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은 이중의 고통이었다. 아내는 두 번 손목을 그었고 한번은 수면제 수십 알을 삼켰다. 그때마다 119구조대가 출동해 간신히 아내를 살려냈다. "아내도 처음엔 독하게 견디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꾸 삶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어요."
아내에게 딸은 자식 이상이었다. 어딜 가든 딸은 늘 엄마를 감싸 안아 다녔고 대학생이 돼서도 초등학생처럼 그날의 모든 일을 재잘거렸다. 억지로 엄마 등을 떠밀어 함께 스포츠댄스를 배우러 다닐 때는 저녁마다 거실에서 서툰 스텝을 고쳐주며 깔깔거렸다. 사건 전날밤에도 딸은 오빠(27·K대학원생)의 카드빚에 속상한 엄마에게 한껏 애교를 부려 기분을 돋구어준 다음에야 제방에 들었다.
그런 딸의 부재(不在)를 아내는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딸의 침구를 철에 맞는 것으로 갈고, 빨래 할 때마다 딸의 옷도 꺼내 살아있는 듯 함께 빨았다. 올들어 옮긴 새 집에도 딸의 방이 꾸며졌다. 책상, 침대 등 가구와 물건들이 고스란히 생전의 위치에 놓였다. 아내는 지금도 잠들기 전 그 방에 들어 "우리 딸, 잘 자"하고 다독인다. "짐승 같은 울음소리란 걸 아세요? 아내가 울 땐 그런 소리가 나와요. 온몸을 갈갈이 찢어내는 듯한 그런 울음이지요."
아내는 제대로 먹지도 않은 채 정신과 치료조차 거부하고 있다. "우리 딸이 그렇게 무서워하며 죽었는데 엄마가 조금이라도 편하자고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딸의 생일이었던 지난 4일 아내는 모처럼 몸을 추스려 딸의 생일상을 차리고 케이크를 마련했다. "아내를 이해합니다. 딸을 잊는다는 것이 제게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지만 우린 그냥 그 애와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어렵게 만남에 응한 하씨는 강남의 한적한 공원을 약속장소로 정했다. 자칫 치밀어 오를 감정을 주변에 보이기가 두려운 때문인 듯 싶었다. 자주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는 용케 긴 대화를 견뎌냈다. 그는 아내의 고통을 많이 말했지만 그게 어디 아내 얘기일 뿐이랴. 그건 차마 아내처럼 목놓아 울 수도 없는 자신의 심정이기도 했다.
"딸이 휴대폰 창에 띄우는 이름이 '보름달'이에요. 엇저녁 귀가 길에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니 보름달이 환하게 떴더군요. 그 순간 우리 딸이 너무나 보고 싶었어요. … 제가 아빠로서의 도리는 제대로 한 건가요." 오랫동안 참았던 눈물이 그 때 비로소 그의 눈에 그렁그렁 고였다.
/편집위원 junlee@hk.co.kr
이 사건은 사위와 그의 이종사촌여동생 하양의 관계를 의심한 장모 윤씨의 청부살인으로 결론 내려진 상태다. 경기경찰청 하승균(河昇均) 강력계장은 "윤씨의 편집증적 성격이 불러온 어처구니없는 비극"이라고 규정했다.
남자친구와의 사소한 대화까지 꼼꼼히 기록된 하양의 일기 어디에도 이종사촌오빠의 얘기는 없을 뿐더러, 재작년 윤씨가 하양을 장기간 미행하도록 시킨 심부름센터 직원 등도 "둘 사이에 어떤 이상한 낌새도 없다"고 진술했다. 터무니없는 의심이었던 것이다.
그럼 왜 그랬을까. 윤씨 부부는 시장 장사에서 시작, 나이트클럽 운영, 사채업 등으로 돈을 모아 지방 중견기업까지 인수한 재력가. 그런 윤씨가 전문중매꾼을 통해 법조인 사위를 보게 되면서 사위 주변에 극도로 예민해 했고, 이 과정에서 수수료를 제대로 못받아 앙심을 품은 중매꾼이 하양이 고3때 잠깐 공부를 돌봤던 사위의 일을 부풀려 흘린 게 도화선이 됐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든 스스럼없이 다감했던 하양의 성격도 의심을 키우는 요인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수사당국이나 주변인들이 납득지 못하는 점은 사위 김씨의 태도다. 장모가 하양은 물론 자신도 미행하고, 하씨 가족이 장모를 형사고소하는 등의 와중에도 적극적으로 일을 수습하려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양 아버지는 "딸을 죽인 자들보다도 사태를 이 지경으로 몰고 가도록 처신한 그를 더 용서할 수 없다"고 분노했다.
윤씨는 지난해 남편이 주가조작으로 복역 중 회사를 농단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고 시동생마저 해치려 한 혐의도 함께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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