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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평생 잊지못할 일]"3점 홈런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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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평생 잊지못할 일]"3점 홈런의 사나이"

입력
2003.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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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방망이를 짧게 잡고 타석에 들어섰다. 짧은 안타를 치겠다는 생각 뿐이었다.1982년 9월 14일 서울 잠실야구장. 한국 국가대표팀은 숙적 일본과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맞붙었다. 8회 말, 눈 앞에는 하늘이 내린 기회가 펼쳐지고 있었다. 고인이 된 심재원 형의 중전 안타를 신호로 역시 세상을 떠난 김정수가 대타로 나서 2루타를 치고 나갔다. 뒤를 이어 몸을 날리듯 배트에 공을 갖다 맞춘 김재박(현대 감독)의 환상적인 번트와 이해창 선배의 안타.

순식간에 벌어진 판이었다. 7회까지 우리는 2회에 내가 친 좌전 안타를 빼면 일본 선발투수에게 꽁꽁 묶여 맥을 못 추고 있었다. 까다로운 상대였던 미국, 대만전에서 완투로 2승을 올리며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던 선발 투수 선동열(전 KBO 홍보위원)이 7회까지 2점만 내주며 선방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무도 3점 역점 홈런이 터지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3루수로 출장해 타율, 타점 등 팀 내 최고 성적을 올려 이전 경기까지 9번 타자였다 이날 5번 타자로 올라온 나조차도. 이거다 싶어 힘껏 휘두른 방망이를 맞고 "따-악!" 소리를 내며 날아간 공은 그대로 담장을 넘겨 버렸다. 홈런, 홈런이었다.

그라운드를 도는 동안 관중들이 외치는 "한대화! 한대화!"하는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듯 했고 별의별 기억이 다 났다. 아버지의 재촉에 새벽 4시에 일어나 산을 오르락 내리락 했던 일, 고교생이 된 뒤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아 투수를 포기한데다 타격에 파워도 붙지 않아 속상해 했던 일, 동국대 선수 시절 평발로 무지막지한 훈련을 감당하지 못해 몇 번이나 팀을 이탈했다 붙잡혀와 두들겨 맞은 일(지금은 이런 일이 거의 없다), 경기에서 실책하고 선배들 눈치 보며 마음 졸였던 순간들…. 힘들었던 기억들이 눈을 벌겋게 하며 한꺼번에 떠올랐다.

홈 베이스를 밟자마자 동료들과 코칭 스태프들이 달려 들어 부둥켜 안았다. 소리 내어 우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종목이든 일본과의 경기는 이기길 바라는 국민의 바람이 워낙 컸기에 그 해 우승은 잊지 못할 일대 사건이었다.

대학 3학년 때 국가대표 상비군에 선발되어 김재박, 최동원, 선동열, 장효조, 이해창 등 쟁쟁한 선수들과 태극 마크를 단 것만해도 영광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날 홈런 한방으로 과분한 찬사를 받았다. 그 홈런 덕택이었을까.

나는 이듬해 83년 OB 베어스에 입단하자마자 시즌 개막전에서 또 다시 3점 홈런을 치며 화려하게 신고식을 치렀고 97년 38세로 은퇴할 때까지 해태, LG, 쌍방울을 거치며 7번이나 개막전 홈런을 쳐 '영원한 해결사' '3점 홈런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 대 화 동국대 야구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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