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문화의 위력을 상징하는 할리우드에서 맹활약 중인 한인들은 누가 있을까. 릭 윤, 마가렛 조…. '할리우드 키드'를 자처하는 웬만한 영화광도 더 이상 이름을 대기 힘들 것이다. 왜일까. 할리우드에서 40년 가까이 활동한 영화배우 오순택(67) 씨에게 그 이유를 묻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한국 영화계에 진출한다고 톱스타가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기악이나 성악, 미술 등 다른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뛰어난 재능으로 승부할 수 있지만 영화계에서, 특히 배우로서 인종의 벽을 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하지만 한인들은 이미 수십 년 동안 그 벽을 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가장 먼저 할리우드에 진출한 사람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남인 고(故) 필립 안씨다. 1905년 미국에서 태어나 36년 '장군 새벽에 죽다'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안씨는 '상해의 딸'(37년), '와셀 박사의 이야기'(44년), '마카오'(52년)등 200여편의 영화와 '샌프란시스코의 거리'등 100여편의 TV 시리즈에 출연했다. 78년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한 뒤 84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이 올랐다.
안씨 이후 가장 주목받는 한인 스타는 2001년 20번째 007 시리즈인 '어나더 데이'에 북한군 특수요원으로 출연한 릭 윤(31·한국명 윤성식)씨. 갓 돌이 지났을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미국 최고의 경영대학원인 와튼 스쿨을 졸업하고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다 우연히 패션계 관계자의 눈에 띄어 랄프로렌, 베르사체 등 유명 패션 브랜드 모델로 활동했다. 할리우드 데뷔작은 일본군 병사로 출연한 99년 '삼나무에 내리는 눈'. 같은 해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선정한 차세대 스타 8명에 들었고, 2001년 박스 오피스 1위를 기록한 '분노의 질주'로 스타 반열에 올랐다.
마가렛 조(34) 씨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여성 코미디언 1호. 94년 전통적인 한국 이민 가정을 그린 abc 방송의 코믹 시트콤 '올 아메리칸 걸'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돼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뚱뚱하고 못생긴 동양 여자"라는 편견에 부딪혀 곧 스타 자리를 내주고 오랜 슬럼프에 빠졌다. 조씨는 그러나 코미디에 대한 열정으로 99년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이라는 브로드웨이 연극으로 재기에 성공, 지난 해 '악명 높은 조'라는 영화에 출연하는 등 다시 주류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007 어나더 데이', '왓츠 쿠킹' 등에 출연한 모델 출신의 윌 윤 리(28·한국명 이상원)씨는 지난 해 피플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뽑힌 기대주. 지난 해 영화 '만점'에 출연한 레오나르도 남(23)씨는 할리우드 진출 3년 만에 LA 타임스가 선정한 '2003년에 주목할 남자배우 3명'에 드는 쾌거를 이뤘다.
이 밖에 2001년 개봉한 블록버스터 '진주만'에 출연한 강성호(31)씨와 지난 해 선댄스 영화제 출품작인 '베터 락 투모로'의 잔 조(30)씨, '프린세스 다이어리'(2001년)의 샌드라 오(33)씨,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는 랜델 덕 김, 훈 리, 마쿠스 최씨 등이 연기력을 인정받고 있다.
외모의 한계에 부딪혀 고전하는 배우들에 비해 한인 제작자와 감독 등은 그나마 실력을 인정 받는 편이다. 한인 최초의 할리우드 거물급 제작자는 영화사 인터라이트의 공동 설립자인 패트릭 최(38·한국명 최대희)씨. 이민 1.5세인 그는 2000년 박스 오피스 1위에 오른 '왓처'와 'DNA','레저렉션' 등 흥행작을 제작했다.
박선민(39)씨는 2001년 톰 크루즈와 '디 아더스'를 공동 제작한 것으로 잘 알려졌다. 99년 제52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인 '황제와 암살자'를 공동 제작한 그는 같은 해 미 연예전문지인 버라이어티의 '주목해야 할 제작자 10인'에 뽑혔다.
이신호(26)씨는 지난 해 '적설'로 미 아태 엔터테인먼트연합(CAPE) 재단의 신인 시나리오 작가상을 수상했다. 폭스 영화사가 후원하는 CAPE 재단의 눈에 든 것은 할리우드 주류 진출을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 없다는 평가다.
이 외에도 지난 해 칸 영화제 감독 주간과 학생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손소명, 손수범 남매와 역시 지난 해 첫 장편영화 '로봇 스토리'로 할리우드의 기대주로 부상한 그렉 박 감독 등이 있다.
/시카고=최문선기자moonsun@hk.co.kr
■ 영화배우 오순택
"당장 밥을 굶을 지언정 한국인을 비하하는 역할은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40년 동안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영화배우 오순택(67·사진)씨는 영화 스크린이나 포스터의 중심에 나와 본 적은 별로 없다. 하지만 한 번도 인생의 중심을 잃지 않았다고 말했다. 영어식 예명을 쓰지 않고 서양인들이 발음하기도 힘든 'Soon Tek Oh'라는 이름을 고집한 것도 자신이 한국인 임을 기억해 달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오씨는 007 시리즈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1974년)와 TV 시리즈 '5-0 수사대' '맥가이버', '마르코 폴로', '에어 울프', '쿵후' 등에 출연한 준 스타급 배우다. 얼굴은 눈에 익지만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100여 편의 출연 영화 중 한국인으로 나온 것은 겨우 한두 편일 겁니다. 할리우드에서 저는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 일본인, 베트남인을 고루 맡을 수 있는 전천후 동양 배우였을 뿐이니까요."
오씨는 57년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2년 뒤 단돈 15달러를 들고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61년 UCLA 영화과를 마치고 그레고리 펙, 폴 뉴먼 등을 배출한 뉴욕 배우 전문학교에 동양인 최초로 입학했다. 비싼 학비와 물가 때문에 접시 닦이, 벌목공, 입주 가정부 등을 전전했지만 "연기는 재능이 아니라 집념의 결과"라는 생각으로 꿋꿋이 버텼다. 정확한 연도도,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첫 출연 TV 영화에선 미군 부대의 음식 깡통을 훔치는 일본군 사병 역을 맡아 '발만 나오는'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를 악 물고 버틴 결과 70년대에는 연기력 있는 동양 배우로 인정 받았다. 80년대까지 버라이어티, 할리우드 리포트 등 유명 연예 잡지에 이름이 빠진 적이 없다.
한국 영화계의 끈질긴 러브콜을 받은 오씨는 2001년 귀국,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기를 가르치고 있고, 올 초부터는 계명대에서도 강의를 시작했다. 오씨는 "한국 영화에 출연할 생각도 있고, 마음에 드는 역이면 조연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며 "40년 동안 주연이냐 조연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직도 "어글리 코리안"
할리우드 영화에 나타난 한인들의 모습은 서양인들의 편견 때문에 여전히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에 한국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70년대 까지 한국은 전쟁의 땅으로, 주로 여주인공의 슬픔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이용됐다. 대표적인 예가 55년 작품인 '모정'. 이 작품에서 한국인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지만, 한국은 주인공이 종군 기자로 갔다가 숨지는 죽음과 이별의 장소로 나온다.
72년부터 83년까지 방영된 TV 시리즈 '매쉬'는 한국전 때 한국 주둔 야전병원을 무대로 했다. 한국 술집 여종업원이 기모노를 입고, 행인들이 베트남식 원뿔 모자를 쓰는 등 엉터리 고증으로 가득 찼지만 에미상까지 탔다.
80년대 이후 한국인은 돈만 아는 독종들로 그려지고 있다. "째진 눈(한국인)들이 뉴욕의 과일, 야채 상점을 다 차지했어! 88 서울 올림픽, 한국 킥복싱 엿먹어라"(89년·'똑바로 살아라'), "한국전 때 도와줬건만, 배은망덕한 놈들. 영어도 못하면서 돈만 밝히는 주제에"(93년·'폴링 다운'), "저들은 한국인이다. 조국이 어려워도 잠도 안자고 24시간 일만 하지."(98년·'택시') 등의 대사는 미국인이 한인을 어떻게 보는 지 보여주는 예다.
이 외에도 '아웃 브레이크'(95년)에선 치명적 바이러스를 미국으로 옮기는 죽음의 화물선이 한국 선적의 태극호이고, '스피어'(98년)에서는 '메이드 인 코리아'가 싸구려 물건을 대표하는 말로 나온다. 최근 '007 어나더 데이'는 한반도 관련 묘사가 왜곡됐다는 논란 속에 한국에서 대대적인 영화 안보기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전찬일씨는 "영화는 한 나라의 사람과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이고 영화를 통해 한 번 고정된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에 할리우드의 편견을 깨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시카고=최문선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