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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장흥 "귀족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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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장흥 "귀족호도"

입력
2003.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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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보고, 견디다 보면 반드시 흥한다고 해서 '장흥(長興)'이라고 했다. '흥(興)'은 그래서, 10년 전 20년 전에도 그랬듯이, 아직은 미래시제다. 군 세수라야 콩밭 매고 뻘밭 매는 아낙네 쌈지만 바라보는 형국이니, 재정자립도로 쳐주는 기초단체 순위로도 전국 최하위권. 그 궁벽이 애닯아도 조급증을 낸 적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온전한 것도 많다. 탐진강 맑은 물이 그렇고, 득량만의 청청 해풍이 그렇고, 마을을 두르고 선 산들이 그렇다. 주민들의 말처럼 '귀족호도'도 그랬기에 장흥에 뿌리를 내린 것인지 모른다.

온대·아열대 식생의 호도에는 9속 63종이 있다. 그래도 '호도는 다 같은 호도'로 알았다고 했다. 굳이 나눈다면 먹는 호도와 못 먹는 호도 정도. 충남 천안의 명물 호도가 먹는 호도라면 장흥 호도는 '먹잘 것 없어 열불 나는' 개호도(가래)였고, 그 기준은 극히 최근까지도 유효했다.

더러 모시적삼에 방구깨나 뀌는 이들이 호도 두 알 쥐고 까르락대며 마실 다닐 때에도, '느자구없는 넘들…'하며 속으로만 여길 뿐이었다. "밭 매니라고 손바닥이 발바닥인디 호도 굴릴 호사가 뭔 말이랴? 그저 줘도 안허제." 고소한 알(배유물)이나 들었다면 부럼으로 썼겠지만 장흥 호도에는 알도 없다. 껍질도 못난 값한다고 얼마나 단단하던지 다람쥐 들쥐조차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 주민들은 줄기 벗겨 염료로나 쓰고, 이도 저도 아니면 뽑아 없애는 게 일이었다고 했다. 신흥마을 홍동댁(67) 할머니는 "시아버지가 생전에 더러 '호도줄기 뱃게 오니라' 허시든 게 그거"라고 했다. 장죽(長竹)에 호도줄기를 돌돌 감아 묵혔다 풀면 용(龍)이 감았던 것처럼 볼만하다던 것이었다.

"한 20년 되았는 갑소. 읍내서 고등핵교 댕기던 큰 애기가 자취집 주인 디린다꼬 호도알을 챙겨갑디다." 유치면 유양림(67)씨는 그 때만 해도 '헐한 손노리개 선물 헐랑갑다'했다고 했다. 그랬는데 이듬 해 그이가 직접 보자기를 들고 와 골라 가더니 고기 사 자시라며 돈봉투를 보내더라는 것. 그 때만 해도 주민들만 몰랐지 그 호도의 값어치를 아는 이는 알고도 남던 시절이었다. 장흥 호도는 희귀한 데다 식용 호도와 달리 조각 칼도 안 들어갈 만큼 단단하고 주름이 깊어 지압용 노리개로는 그만이었다. 서울서 호도를 사러 왔던 심재민씨는 "어릴 때 선친이 애지중지하던 장흥 호도를 만졌다가 호통을 당했던 기억이 아련하다"고 했다. 장흥군청 관계자는 "돈봉투 건네기 뭐한 자리에 선물용으로 챙겨갔던 게 호도"라고 말했다. 이제는 광주 '홍사장'도 목포 '문사장'도 장흥 호도라면 봄부터 줄을 선다고 했고, 지난 해 서울의 한 유명 백화점은 오동나무 상자에 담아 한 쌍에 30만∼120만원씩에 팔기도 했다. 주민들은 그 호도에 '귀족호도'라고 이름을 붙였고, 9월부터 10월 수확철까지는 나무 아래에 아예 텐트를 친다. 귀한 자식 불알로 알아, 지키기 위해서다.

귀족호도는 토종 가래와 식용호도가 자연 교배해 난 변종이라는 게 지금까지의 추정이다. 갈아 먹을만한 땅에 난 것들은 다 뽑아버려 현재 남아 있는 100년 이상 수령의 큰 나무는 9그루가 고작이다. 장흥군 농업기술센터가 5개년 계획으로 귀족호도 접붙이기 번식사업을 시작한 것은 1994년. 천상 가지를 구해야 했다. 귀족호도 한 그루 소출이 스무마지기 농사보다 나았고, 가지 하나에서도 쌀 한가마니씩 열리던 시절. 당시 번식사업 주역이었던 김재원(46)씨는 "수건·양말도 돌리고 음료수도 사들고 주인에게 통사정해서 서너가지씩 꺾었다"고 말했다. 때로는 어른들이 집을 비우는 장날을 틈타 그 집 사위나 아들 딸 설득해서 꺾어오게도 했고, 그런 뒤면 으레 "어떤 자슥이 가지를 따 가부렀다"는 고함과 함께 삼지사방 범인 색출작업이 벌어지기도 했다며 웃었다. 그렇게 탄생한 200여 주의 2세 귀족호도는 군청과 법원 등 군내 각급 기관에 분양됐고, 일부는 일반 유실수 묘목 값의 10배인 그루당 5만원씩에 팔려나갔다.

귀족호도의 본격적인 증식사업은 지난 해 1월 시작됐다. 귀족호도 중에도 최고로 쳐줬던 유치면 늑용리 유씨의 200년생 호도나무가 탐진댐 수몰지구에 든 것. 태풍에 일지(一枝 ·가장 굵은 가지)가 찢긴 판이어서 이식도 불가능했던 터였다. 유씨는 한해 2,000만원 소득을 내주던 그 나무를 목각용으로 팔았고, 못내 아쉬워 김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김씨는 그 나무에서 550주의 묘목을 만들었고, 군청을 통해 장흥군 10개 읍면 284개 마을마다 한 주씩 마을 나무로 기증됐다.

경제수령(약 20년)을 넘긴 나무에 열리는 호도는 약 150∼200개. 이 가운데 귀족호도라고 부를 만한 명품을 고르면 50∼60개(25벌 내외)에 불과하다. 호도알 능선(봉합선)이 둘로 나뉘는 양각 외에 명품 중의 명품으로 치는 3각이나 4각호도는 1,2개가 고작이다. 그래서 3,4각 호도의 색과 크기와 모양을 맞춰 한 쌍을 만드는 데는 2,3년은 걸린다고 했다. 올해 예상되는 장흥 귀족호도 소출은 7년생 이상 어린 나무까지 쳐서 약 500벌. 5년 뒤면 1,000벌이 되고, 10년 뒤면 못 해도 3,000∼4,000벌은 될 터다. 올 10월에는 호도 축제도 열어볼 참이다. 호도따기 체험행사와 짝 맞추기, 품평회 등도 기획하고 있다.

호도나무 나이테가 자라듯, 느리지만 실하게 장흥이 흥(興)할 것으로 주민들은 믿고 있었다. 호도나무가 효도나무라는 것이다.

/장흥=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사진 박서강기자

● 귀족호도박물관

억불산 자락은 넓기가 팔폭 치마다. 그 자락을 붙들고 장흥 읍내가 생겼다. 5만 군민 8만 출향민이 고향을 나고 들 때면 으레 억불 능선에 되똑한 큰솔나무에 문안한다고 했다. 그래서 억불산은 어머니 산으로 통한다.

얼마 전, 그 산 아래 2층 양옥이 한 채 섰다. '귀족호도박물관(장흥읍 항양리)'이다. 99년 농업기술센터 기술개발팀장을 지내고 물러난 김재원씨가 '광주 충장로에 집 두 채를 짓고도 남을 돈'을 들여 지난해 11월 개관한 것이다. 김 관장은 "어머니 품에 선 호도나무가 5만 군민의 탯줄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박물관은 소박했다. 금은방처럼 놓인 진열대에는 귀족호도알 100여 개가 쌍쌍이 놓였다. 고풍스런 멋은 관광지 토산품점에 니스칠하고 앉은 것들이나 공장에서 찍어내는 금박 손노리개와는 댈 것이 아니다. 그 중에 몇몇은 억만금을 줘도 못 판단다. 김 관장은 "보기에는 이래도 전국 각지 호도 애호가들이 이 놈들 보려고 찾아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외지 사람들이 하나 둘 끌리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게 장흥의 재산이 되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나무에서 나는 유별난 것들은 팔지 않고 박물관에 진열한다.

호도는 원래 소리없이 굴리는 게 예법이다. 소리를 내면 '그만 돌아가라'는 신호로 알고 일어서던 게 옛 사람들의 은근한 풍류다. 제 손을 떠난 호도는 제 것이 아니라고도 했다. 그래서 친한 벗이 오면 호도 알을 아예 놓고 담소했고, 사랑방을 나서며 슬며시 쥐고 가도 시비하지 않던 게 호도다. 지금은 '장(長)자' 붙은 이들이나 선물로 챙겨 드는 귀족호도지만, 그 덕에 마을도 소득을 올리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공급량이 늘어 값은 좀 내리더라도 그 풍류까지 복원했으면 하는 게 김 관장의 욕심이다. "비싼 놈이라고 호도에다 금을 박아다니는 이도 더러 있다"며 "하지만 그건 호도의 맛이 아니다"고 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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