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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쓴소리]변화는 고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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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쓴소리]변화는 고통이다

입력
2003.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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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고통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때 어느 사회에서나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라를 만들기 위해 잠시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길만이 우리 모두가 승리하는 길이다.… 전(全)장군에게 이 쓰라린 역경들은 오히려 견인불발의 인내심, 물욕에 대한 초탈, 체질화된 서민의식, 도덕적 겸허주의, 남의 고통에 대한 연민 등의 덕성을 길러낼 수 있는 토양이 되었을 것… 양담배 한 갑 정도의 부조리도 참아 넘기지 못하고 바로잡았던 원칙장교로서의 용명을 날렸다고 한다. 청년장교의 우국의 울분 속에 이미 개혁과 숙정의 의지는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1980년 8월 21일 전군 지휘관회의가 전두환씨를 차기 대통령으로 추대한 직후 나온 조선일보의 주장이다. 이 주장을 문제삼기 위해 인용한 게 아니다. 노무현 정권과 조중동(조선-중앙-동아) 사이의 치열한 갈등을 완화시킬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어차피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제압하는 건 불가능하다. 각자 튼튼한 지지 세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타협책을 모색해보자.

'변화는 고통이다'라는 말에 주목해보는 건 어떨까. 물론 광주학살을 저지르고 헌법을 유린한 신군부의 집권까지 그 말로 정당화했던 조선일보의 생각엔 동의할 수 없지만, 조중동에게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주문할 수는 있지 않을까. 과거 이 신문들이 독재정권들에게 보였던 그 무서운 인내와 관용과 포용력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단지 물리적 위협의 존재 여부에 따라 그게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면 그건 너무 처량하지 않은가.

지금 조중동이 추구하는 저널리즘은 '갈등 저널리즘'이다. 갈등을 키워 파는 방식이라는 뜻이다. 그것도 좋은 상술이기는 하나, 수명이 짧거니와 노동력의 질을 저하시켜 궁극적으로 신문 산업 전반에 부메랑으로 작용할 수 있다.

갈등 저널리즘의 기존 틀을 좀 바꿔보자. 그렇게 하기 위해선 기존의 '정권 중독증'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독재정권 시절엔 정권을 찬양했고 지금은 정권을 비판한다는 점에선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모두 정권을 보도와 논평의 '태양'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선 똑같은 것이다.

열심히 싸우다 보면 이성을 잃기 쉽다. 자신이 이성을 잃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조중동에게 권한다. 최근 한달 동안 생산해낸 자사의 사설만이라도 다시 읽어보시라. 대부분이 노 정권 비판이다. 이걸 정상이라고 생각하는가? 조중동 거드는 일부 언론학자들도 그런 연구를 해보면서 조중동의 이성부터 검증해보기 바란다.

정권 중독증에서 벗어나 '의제 설정'을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해가면서 신문들의 특성을 개발해보자. 그런 점에서 최근 시도되고 있는 기자단 제도의 대변화는 축복일 수 있다. 물론 오랜 세월 익숙해 있던 제도와 관행에서 벗어나자니 당혹과 더불어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변화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갈등 저널리즘의 틀에서 탈출하는 데에도 만만치 않은 고통이 있을 것이다.

광주학살이라는 범죄 행위를 저질렀던 신군부의 집권을 용인하는, 변화에 따르는 고통까지 기꺼이 감내했던 조중동이 이제 와서 겨우 그 정도의 변화마저 거부한다면 그건 말이 아니다. 물어 뜯으려고 으르렁대지만 말고 국익을 위해 만인이 동의할 수 있는 성격과 수준의 사회개혁을 위해 신문이 앞장서서 할 일은 없는지 그걸 고민해보자.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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