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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47) 배움과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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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47) 배움과 가르침

입력
2003.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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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숙 선생의 가르침은 두 가지 의미에서 나에게 결정적인 힘으로 자리했다. 내가 음악 활동을 해 나가는 데 방향타가 됐고, 뒷날 직접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을 때 듬직한 교사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문답과 대화 등 선생의 수업 방식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 개개인의 음악성과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해 나갈 지에 대한 배려까지 포함한 수업은 '예술 수업' 하면 언뜻 떠오르는 딱딱한 격식을 일거에 타파하는 것이었다. 엄격한 화성학이나 대위법도 인간이 만든 것에 불과하므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선생은 늘 강조했다.

그렇다고 이 선생이 기존 음악 교육 방식에 반기를 든 혁명적 교사였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선생은 오히려 전통주의자에 가깝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존의 지식을 기반으로 하되, 마음껏 변형하고 조리해 낼 수 있는 틀을 제공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나로서는 스승과의 인연이 단 한 번의 취입만으로 끝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다.

1995년부터 당시 전문대였던 수원여대 클래식 음악과에 겸임 교수로 초빙돼 교단에 서고 보니 당시 이 선생 덕분에 완벽하게 마스터 해 낼 수 있었던 음악 이론들이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일견 나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거기서 2년 남짓 강의를 할 수 있었던 게 모두 이 선생이 다져 준 음악적 기초 덕택이다. 그러나 순수 음악을 굳이 내가 가르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1년 반을 조금 넘기고는 교편을 놓았다.

내가 대학 교육에 참 의미를 발견한 것은 수원여대로 격상된 그 학교에 97년 국내 최초로 대중음악과가 설립되고, 학과장으로 초빙받으면서 부터 였다. 그 동안 대중음악의 대학 교육 선례가 없던 터라, 나는 학생 관리는 물론 커리큘럼 작성까지 맡았다. 나의 교육 방식이 모범 사례가 될 판국이었다.

나는 기존의 학제나 방식을 무시하고 나만의 록적인 교육 시스템을 세웠다. 즉, 실제로 사회에 나가서 대중 앞에서 음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비중을 뒀던 것이다. 그를 위해, 학교측이 나에게 교육 의향을 물어 왔을 때, 난 이 시대에서 록을 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필수 시설 마련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미디(MIDI) 기기, 매킨토시 컴퓨터(프로톨, 로직), 앰프, 기타, 키보드, 마이크 시스템 등 1억 5,000만원 상당의 첨단 기재가 필요하다고 했다.

사실 제대로 하자면야 말도 안 되는 적은 금액이지만, 꼭 필수적인 것으로, 그러나 고급 기종으로 뽑아낸 예산이었다. 그 정도를 뽑을 수 있었던 것은 나만의 노하우가 축적돼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측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해 작사와 청음 수업을 커리큘럼에 추가시킨 것 역시 내 음악 경험의 산물이다.

수업시간에 나는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쳐주고 그것을 악보로 적게 하는 방식으로 청음과 기보의 요령을 습득시켰다. 그것이 음악의 시작이고 대원칙이기 때문이다. 화성학 등 기초가 약하면 평생 고생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덕에 나는 학생들에게 그 수업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했다.

다행스럽게도, 연주 실력이 거의 프로급이었던 학생들은 나의 자유스런 수업 시간을 다들 좋아 했다. 음악이란 교사가 얼마나 잘 이끄는가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는, 이교숙 선생으로부터의 교훈이 그런 식으로 표출된 것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하다보니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다. 강사들에게도 월∼목요일은 화성학이나 대위법 등 이론 위주의 수업을 개인 레슨식으로 실시하라고 지시했고, 금요일에는 모두 모여 콘서트 시간을 가졌다. 나는 우선 그 시범으로 교가를 록식으로 편곡해 선보였다. 한번 상상해 보라. 록으로 거듭난 교가를. 그것도 교수가 교가를 록으로 편곡하고 학생들은 다양한 성악과 기악으로 화답하는 광경을.

특히 금요일의 콘서트는 교실을 가로막고 있던 칸막이를 헐어 두 개의 교실을 하나로 만들었으니 지하 소극장과 진배 없었던 시중의 답답한 록 공연장이 부럽지 않았다. 미 8군 시절의 서비스 클럽이나, 내가 80년대에 만든 라이브 록 클럽 '라이브'나 '록 월드'가 캠퍼스에 살아 돌아온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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