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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랑이 없는 성

입력
2003.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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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바노이 지음·황경식, 김지혁 옮김 철학과현실사 발행·1만6,000원

성과 관련된 맥락에서 정상, 비정상을 구별하기 위해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자연스럽다'이다. 그럼, 여기 남색(男色)에 대한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는 비정상인가? 그의 생각과 행위는 자연이 허락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그런 충동은 흔하지 않거나 한심한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태풍이 그런 것처럼 완벽하게 자연적인 현상인가?

대답하기 어렵다면 이 사람을 사회적 규범을 어기는 사람쯤으로 정의하는 건 어떤가. 그래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간통은 사회적 규범을 어기지만 변태로 여기진 않는다. 공공장소에서 입맞추는 것이나 오럴 섹스는 한때 사회적 규범을 어긴 것이었지만 지금은 몇몇 보수적인 사람들만 비난할 뿐이다.

그러면 사랑이 없는 성은 어떤가. 뉴욕주립대 철학과 교수인 저자는 '사랑이 없는 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사랑을 동반한 성보다 사람들에게 더 큰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이다. 1970년대 초반부터 '사랑과 성의 철학'이라는 강의로 화제를 불렀던 그는 10년 강의의 내용을 논점별로 정리해서 이 책을 썼다.

저자는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섹스여야 옳다'는 전통의 성 관점을 단순한 이원론에 바탕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 이원론은 성에 대한 추구는 사랑 아니면 이기적 목적을 위한 저열한 탐닉 행위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바노이는 이 두 극단 사이에 폭넓은 중간 지대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랑해야만 섹스가 가능한 건 아니다. 타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단순한 애착, 호감, 우정, 관심의 표현일 수 있으며 상호 동의와 욕구에 바탕한 신체적 호응일 수도 있다.

따라서 성의 추구를 품위를 손상하거나 타인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여길 필요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사랑, 헌신 등 심각한 어떤 것과 결부할 필요도 없다. 나아가 저자는 사랑 없는 성을 더 옹호한다. 자위 행위나 대체물을 통해 성적 만족을 얻는 것은 은밀하고 사적인 성적 표현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즐거운 경험이다. 특히 쾌락과 행복에 대한 기대라는 관점에서 볼 때 사랑과 무관한 성은 꼭 사랑을 동반해야 하는 경우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성의 관행은 새로움, 다양성, 모험을 가능하게 해 더 큰 즐거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성 관계에는 사랑이 필수라는 생각은 불가피하게 좌절과 불행을 야기하는 모순되는 이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시쳇말로 '형이하학'을 규정하기 위한 바노이의 이런 '형이상학'적인 노력이 프리섹스주의를 유포하는 데 목적을 둔 건 아니다. 섹스에는 꼭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마치 강박과도 같은 관념을 철학 논리로 거부하는 훈련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1981년 출간된 것이라 조사, 인용된 수강학생들의 성 태도 등이 요즘과 맞지 않는 부분도 있을 듯하지만 성과 관련해 여전히 유효하고 재미있는 논점들로 가득 찬 책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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