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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778>바르샤바 게토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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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778>바르샤바 게토 폭동

입력
2003.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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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4월19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에서 무장 폭동이 일어났다. 이 날은 기원전 13세기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과월절(過越節) 축제의 첫 날이자 히틀러의 생일 하루 전이었다. 그 때까지 바르샤바 게토에 남아 있던 약 5만명의 유대인들은 하루하루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었다. 독일 나치 정권은 그 전 해 여름까지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26만5,000명을 트레블링카의 절멸 수용소로 보냈다.1943년 1월 게토의 유대인들이 나흘 동안 시가전으로 저항하며 수용소행(行)을 거부하자 나치는 그 뒤 얼마 동안 멈칫하며 손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60년 전 오늘, 나치 군대는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모두를 수용소로 보내기 위한 작전을 개시했고, 유대인들은 수류탄과 라이플로 무장한 채 격렬히 저항했다. 5월16일 나치가 바르샤바의 유대교 대회당(大會堂)을 파괴하고 게토를 완전히 점령할 때까지 4주 동안 바르샤바 거리들은 피로 덮였다. 이 전투에서 유대인 7천여명이 사망했고,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모두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됐다. 그러나 독일군 측도 수백명의 사망자를 냈다.

게토는 중세 이후 유럽에서 유대인들을 강제로 격리하기 위해 설정한 유대인 거주 지역을 가리킨다. 유대인 격리 정책은 12세기 이래 유럽 대부분 지역으로 퍼져나갔지만, 게토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516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설치된 유대인 거주 지역에 대해서라고 전한다. 이 말은 20세기 중엽 이후 미국에서 흑인이 모여 사는 지역에 대해서도 사용되게 되었다. 흑인 게토는 유대인 게토와 달리 법률적으로 강제된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경제적 조건이 거의 법률적 강제만큼이나 힘을 발휘해 형성된 특정 인종의 밀집 지역이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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