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 타임벨이 울리자 복싱체육관을 가득 메운 여성들이 일제히 샌드백을 두드린다. 3분 후 "땡" 소리가 나자 거친 숨을 몰아쉬며 30초간 땀을 식힌다. 잠시후 다시 벨소리와 함께 "퍽퍽" 샌드백이 앞뒤로 흔들리고 불끈 쥔 여성들의 주먹이 허공을 가른다.14일 오전11시 서울 논현동 김광선 권투체육관. 미모의 피부과 전문의 정혜신(35·청담이지함피부과) 원장이 사각의 링 위에서 비지땀을 쏟아내고 있다. "탓탓탓…." 마치 프로복서처럼 능수능란하게 줄넘기와 스트레칭 체조를 한 뒤 8온스짜리 글러브를 끼고 원투 스트레이트, 훅 , 어퍼컷…. 펀치를 날리는 정씨의 모습에서 신선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와 야성적인 강렬한 이미지가 충돌한다.
체중감량의 마지막 선택은 복싱
요즘은 아기 엄마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늘씬하고 탱탱한 몸을 지녔지만, 정씨는 98년 아들을 낳은 뒤 82㎏(신장 163㎝)으로 불어난 체중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이후 온갖 다이어트식품 복용과 약물요법으로 살빼기에 매달렸지만 실패를 거듭한 뒤 수영 등 꾸준한 운동으로 5년만에 30㎏감량에 성공했고 현재는 52㎏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복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1년 가을.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차에 타는 순간 복면 강도가 문을 잡아당기며 차 속으로 쳐들어오려 했다. 혼비백산 놀란 정씨는 가까스로 소리를 질러 강도를 쫓았지만 호신술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다 최근 재활의학과 의사인 남편이 "여성들을 위한 복싱에어로빅이 요즘 인기"라고 추천하자 한달전 부담없이 체육관을 찾았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샌드백을 치면 머리속이 시원해질 정도로 이젠 복싱 자체가 목적이고 살 빼는 것과 건강은 덤으로 얻고 있어요." 정씨의 복싱예찬론이다.
아버지가 외교직 공무원이었던 정씨는 4살때 푸에르토리코로 건너간뒤 초등학교는 덴마크에서, 고교시절은 미국 뉴올리언스와 캐나다 밴쿠버에서 보냈다. 중학교와 대학교(연세대 의대)만 한국에서 졸업했다. 초등학교땐 농구 선수에 뽑히기도 했고 스위스로 건너가 일찍부터 스키를 배웠다.
승마와 윈드서핑도 수준급 실력. "여러 스포츠를 경험한 제가 웬만하면 좋다는 얘기를 안 하는 데 복싱처럼 엔돌핀이 돌고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 운동은 처음이예요." 정씨는 "심폐기능 향상으로 피부관리도 하고 유산소운동 중 칼로리 소모량이 두드러져 가장 단시간에 체중을 줄일 수 있어요. 호신술까지 배우니 1석3조예요"라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잽·스트레이트에 살빠지는 소리
정씨는 경쾌한 최신 가요가 쿵쾅거리는 가운데 "주먹을 뻗을 때 내밀다가 딱 끊어친다는 느낌으로 뻗어야 한다"는 김 관장의 조언에 따라 원 투 쓰리 스트레이트를 반복했다. 이때의 포인트는 오른주먹을 칠 때 어깨와 허리가 함께 돌아가고 왼발을 축으로 오른쪽 뒷발을 돌려 무릎을 쫙 펴야한다는 점. 팔로만 허우적 거리는 것이 아니라 체중이 실린 펀치가 날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달까지 체급을 라이트 플라이급(48㎏)으로 더 낮출 계획인 정씨는 각종 기본동작들이 부위별로 살을 빼준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팔을 뻗는 잽스트레이트는 가장 신경쓰이는 팔뚝살, 위빙 및 더킹 등 피하고 숙이는 동작은 복부와 허리, 허벅지의 지방제거에 효과적이다. 또 스텝동작은 종아리 지방제거에 탁월한 효능이 있고, 발뒷꿈치를 들게돼 처진 엉덩이를 올려준다.
의사, 주부, 케이블TV 진행자 등으로 맹활약중인 정씨. "복싱은 회식 술자리로 나온 배를 집어넣고 남자로서 자신감을 갖게 하는데 확실한 효과가 있으니 당장 시작하세요." 정씨는 기자에게 복싱을 '강권'하며 다시 샌드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박석원기자 spark@hk.co.kr
■ 김광선 관장
1960∼80년대 온 국민을 열광시킨 인기스포츠 복싱은 90년대 들면서 다른 프로구기종목의 급성장과 함께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5년여전부터 여성들의 다이어트를 위한 레포츠로 변신해 상당수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복싱체육관은 이제 식당종업원, 구두닦이 등 불우한 청소년들이 세계챔피언을 꿈꾸는 곳이 아니라 몸매관리 등 윤택한 삶을 가능하도록 하는 공간으로 성격이 바뀐 셈이다.
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김광선(사진) 관장은 "80년대 엄청난 스피드로 세계복싱을 주름잡았던 슈가레이 레너드가 최초로 시작한 게 복싱에어로빅"이라며 "레너드때는 스트레이트 위주로 좀 단조로왔던 반면 훅과 어퍼컷 등 다양한 기술로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 우리 체육관의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했다. 과격한 동작을 배제하고 복싱기술을 최대한 이용한 움직임은 누구나 손쉽게 배울 수 있으며, 나오미 캠벨 등 미국의 슈퍼모델들도 복싱에어로빅을 통해 체형을 관리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 관장에 따르면 여자 회원들이 단순히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들렀다가 복싱의 매력에 흠뻑 빠져 아마추어 선수로 등록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14일 경북 영주에서 끝난 제1회 회장배아마추어 여자복싱대회에서는 이 체육관 소속의 조영미(은광여고3년) 선수가 밴텀급(54㎏)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다. 김 관장은 "간단한 스트레칭과 줄넘기로 몸을 푼 뒤 거울을 보며 자세를 잡아보는 새도우복싱 등 1시간만 운동하면 1㎏가량의 살이 빠져나간다"며 "스트레이트, 훅, 어퍼컷 등 3개월이면 기본기를 익힐 수 있다"고 말했다. 수강료는 월 10만원(30가지의 헬스기구 이용). 강남점 02―546―1196 회기점 02-964―1912
/박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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