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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46) 스승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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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46) 스승의 힘

입력
2003.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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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숙 선생한테서 터득한 음악적 지식이 없었다면 나는 작곡의 길로 접어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고 싶다고 해서 당장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먼저 기본 화성학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그것은 거의 수학과 맞먹는 대위법의 원리를 떼고 나서야 가능했다.가방 끈 짧은 내가 증·감·장·단 화음이다, 4성 진행이다, 뭐다 해서 복잡한 화성학의 실체에 파고 들려니 결코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숙제는 많지, 골치가 아파 왔다. 그러나 다 떼고 보니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특히 나중에 내가 강단에 서 보니 제대로 공부할 틈을 내기 힘든 기초 화성학 같은 과목을 그 때 배워둔 게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모른다.

1주일에 3∼4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방안에 칠판을 하나 갖다 놓고 진행된 그 수업에는 나 같은 준 프로들이 옹기종기 모여 노트를 해가며 늦깎이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 수업을 들었기에 나는 당시에 하고 있던 음악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특정 음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그것을 가능케 한 배경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이 선생은 강의에서 음 현상, 음의 근본 등 본질적인 문제를 항상 강조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들을 어떤 음악가로 키워나갈 것인 지를 염두에 두고 계셨다는 점이다. 이 선생은 연주, 이론, 작곡을 하나의 큰 묶음으로 보고 종합적으로 가르쳤다.

강의를 들은 지 반년쯤 뒤의 일이다. 그 동안 배운 내용을 토대로 해 작곡 숙제를 해낸 직후였다. 딴 학생들은 시험지에 점수를 매겨 다 돌려 주는데, 내 것만 안 내 주는 게 아닌가. 안 그래도 학생 가운데 최연소자라 맨 뒤에 앉아 수업을 듣고 있던 나는 '행여 뭐가 잘못 되기라도 했나' 싶어 가슴이 조여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선생은 내 숙제를 오선 칠판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리곤 이 부분은 어떤 의도로 이렇게 했는지 감탄하면서 조목조목 설명해 주었다. 나보다 내 속을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모두 나보다 연장자인 학생들밖에 없던 터라, 나는 행여 건방지게 보일까봐 그 자리가 불편하기만 했다.

그 수업으로 나는 음악에 진짜 용기를 갖게 됐다. 이후 내 작품들에는 당시 숙제로 제출했던 것들이 크게 혹은 작게 스며들어 있다. 자신이 가르친 그대로 학생이 따라주길 바라는 여타 선생과 달리, 이 선생은 항상 자신의 것과 달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미 8군에서 일하던 어떤 가수가 팝송을 한 곡 갖다 주면서 내일 아침까지 편곡해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날 따라 바빴던 이 선생은 밤중에 그 음악을 한번 들었을 뿐인데, 정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게 언뜻 들은 기억으로 작업을 했는데도 가수의 요구를 다 맞춰주었다. 그게 이 선생의 능력이자 장점이었다.

그는 한국 음악사에서 클래식부터 대중음악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던 유일한 사람이라 해도 좋다. 음악의 장르 구분 없이 능통했던 그가 군악대에게 현대 음악을 연습시킬 때는 오해도 적잖이 받았다고 한다. 불협화음이란 개념이 생경했던 사람들이 와서 "무슨 튜닝을 그렇게 오래 하느냐", "튜닝이 왜 그리 맞지 않느냐" 며 항의조로 물어 온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미군 무대를 떠나자 끊겼던 이 선생과의 인연은 1973년 다시 이어졌다. 내가 서유석 한테 줬던 사이키델리곡 '선녀'를 녹음할 때, 뭔가 신비한 분위기가 필요했다. 그 때 생각난 게 이 선생의 하프였다. 옛 제자의 부탁을 받은 이 선생은 흔쾌히 수락했다. 지난 3월 CD로 복각된 서유석의 음반 '선녀'에 바로 그의 연주가 수록돼 있다.

단언컨대, 요즘에는 이 선생 같은 음악인이 없다. 음악 하는 사람들을 보라. 모두 자기가 아는 것만 하지 않는가. 보다 근본적인 것은 팽개쳐 두고, 세분화와 전문화의 틀에 갇혀 있는 모습들뿐이다. 여름이면 선글라스를 끼고 우렁찬 목소리로 강의하시던 이 선생이 요즘 같은 때면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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