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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의친왕 독립투쟁 기록 國恥 책임에 가려져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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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의친왕 독립투쟁 기록 國恥 책임에 가려져 아쉬워요"

입력
2003.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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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의친왕의 복권 노력은 2년 전에 접었습니다. 보훈처의 서훈(敍勳) 불가 판정도 있었지만 그 전에 이미 명예회복 작업이 가족, 형제에게 오히려 좋지 않은 인상만 심어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이해경(73·李海瓊)씨는 조선의 마지막 왕족이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며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이복동생 의친왕 이 강(李堈·1877∼1955)공의 다섯째 딸이다. 1950년대 몰락해가는 왕가의 처지가 너무 싫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도미(渡美)했던 그가 15일 열린 모교인 경기여고 내 경운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

10여 년 전 세워진 경기여고 내 의식주 테마 전시 공간을 동창회 기부금 등으로 확대 개편한 이 박물관에 그는 소장하고 있던 원삼(圓衫)과 당의(唐衣), 노리개 등 6가지 왕실 의류와 장식품을 내놓았다. 그의 방한 소식을 듣고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에서 특별 강연을 요청해 17일에는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란 주제로 교수와 대학원생 앞에서 아버지를 회고하는 자리도 가졌다.

숙소인 서울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만난 이씨는 예상보다 정정했다. 젊은 시절 성악가를 꿈꾸던 이답게 목소리도 카랑카랑했다. 동행인도 없이 뉴욕서 도쿄를 경유해 17시간 비행기를 타고 혼자서 왔다고 한다. 한국 방문이 처음은 아니다. 1975년 의친왕의 정비인 의왕비의 보모로 있다가 자신을 낳은 생모 김금덕 여사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19년 만에 조국을 찾았다. 그 해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이후 이따금 한국에 들른 건 모두 아버지의 명예 회복 때문이었다.

"망국 당시 왕족이나 고관들은 국치(國恥)의 책임을 물어 서훈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국가보훈처 내규 때문에 아버지의 독립 투쟁 기록이 지금까지 외면당했습니다." 일반의 인식도 대개 이랬던 탓에 13남 9녀인 형제 중 누구도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말년에 주색에 빠졌다"고 비난받던 의친왕의 복권을 위해 선뜻 나서지 못했다.

왕족 가운데 유일하게 그가 이 일에 뛰어든 것은 경제적인 이유로 성악가의 꿈을 접고 1969년 컬럼비아대 동아시아 도서관 사서로 일하기 시작한 뒤부터였다. 거기서 일본 서적을 수도 없이 접하면서 파락호로만 알았던 아버지가 독립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던 인물로 기록된 걸 발견한 것이다.

의친왕은 1919년 11월 상하이 망명을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독립신문' 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 해 상복을 입고 상하이로 가려다 일본 경찰에 잡혀 재판에 회부됐으며, 같은 해 대동단 총재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하기도 했다.

이씨는 그런 자료를 읽으며 아버지의 복권을 결심했다. 왕족의 마지막 후손인 자신의 세대가 그런 식으로 먹칠 당하는 것이 싫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복권을 위해 사방팔방으로 노력하던 그는 2년 전 서울대의 한 교수가 던진 말에 가슴이 아렸다. "아버지의 명예를 되살리려는 효심은 알겠지만, 그가 아무리 애썼어도 독립을 위해 피 흘리고 목숨 버린 숱한 민중의 아픔에 어찌 비하겠느냐." 그때 이씨는 '왕정시대 몰락한 왕의 책임을 통감했다'고 한다. 아버지를 복권하려는 노력을 접었던 건 그 직후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한국을 찾겠지만 "영구 귀국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범수기자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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