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루 전인 4월1일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연락을 받고 황급히 부산으로 내려갔으나 아버지는 이미 의식을 놓고 계셨다. 연세가 여든 셋이었으니 이른 죽음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쇠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2년 전 가을부터였다. 뚜렷한 병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노쇠 현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누워 계시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식사량이 줄어들었고, 다리의 기능이 빠르게 약화되었다. 앉는 것도 일어나는 것도 힘겨워 하셨다. 돌아가시기 열흘 전부터는 곡기를 끊으셨다. 물마저 거절하셨다. 아버지의 몸은 앙상한 새처럼 말라갔다. 인간의 몸이 극도로 마르면 새의 형상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아버지의 몸을 통해 알았다.내가 처음 소설을 발표했을 때 아버지는 기뻐하셨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았다.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을 뿐이다. 내가 아버지의 기쁨을 확인한 것은 이승에 남기신 일기를 통해서였다. 놀랍게도 일기는 자식이 소설가로 발돋움하는 과정을 내밀하게 응시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한 고조부(아버지에게는 증조부)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고조부가 급제하셨을 때 고향인 하동(河東)은 물론 경남 전체가 떠들썩했다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자주 들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고조부를 자랑스러워 하신 것은 그분이 뛰어난 문장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고조부를 급제시킨 것은 시문(詩文)이었다. 시문이야말로 한 집안의 명성을 드높였을 뿐 아니라 벽촌의 선비를 순식간에 출세시킨 눈부신 날개였다.
문사(文士)에 대한 아버지의 외경이 자식의 소설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이어진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조선의 전통적 지식인인 문사(선비)와 오늘날의 소설가를 동일시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교육자로서 보편적 교양을 추구하신 아버지가 '글은 곧 사람'이라는 문사의 정신과, 장인적 기교를 중시하는 근대적 미학주의자 정신과의 차이를 모르셨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시선이 문사의 정신 쪽으로 기울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것은, 선비 후손으로서의 자의식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 자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제사 때였다. 아버지의 절하시는 모습은 비유를 하자면, 온몸으로 기도를 드리는 형상이었다. 여기에서 또 다른 비유가 필요한 것은, 살아 있는 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혼에게 온몸으로 기도 드리는 행위란 '문학 하는 자'의 자세인 까닭이다. 그러니까 나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 하는 자의 자세를 보아온 것이다. 바로 곁에서.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집 제사는 일년에 열 번이었다. 명절까지 합하면 한 달에 한 번 꼴로 제사를 지냈다. 좁은 한옥이라 제사상은 안방에 차렸고, 절은 대청마루에서 했다. 제사는 자정이 넘어야 시작되었다. 자정 전에는 귀신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 의하면 그때의 겨울 추위는 지금보다 훨씬 혹독했다. 얼음장 같은 대청마루에 서 있으면 몸이 덜덜 떨렸다. 이상한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였다. 그분들은 전혀 떨지 않았다. 나무처럼 고요히 서 계시는 그분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추위를 막는 투명 유리 안에 서 계시는 것 같기도 했고,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그분들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것은 1968년이었다. 시골로 여행을 가셨다가 잘못 넘어져 척추를 다쳤는데, 2년 후 돌아가실 때까지 기동을 제대로 못하셨다. 제사의 중심이 할아버지에서 아버지에게로 이동했다. 제문(祭文)도 아버지가 쓰셨다. 90년 초 제사가 아버지의 거처였던 부산의 작은 형님 집에서 서울의 큰 형님 집으로 옮겨진 후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제사의 중심이었다. 제삿날이면 어김없이 서울로 올라오셨다. 아버지 없는 제사를 생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몸이 쇠약해지면서 제사의 중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기차 타는 시간만 네 시간 반이다.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는 아버지에게 상경(上京)은 죽음을 재촉하는 길이었다. 식구들이 말리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고집은 완강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걸음으로 제사상 앞에 서셨다. 절도 제대로 못하셨다. 부축을 하지 않으면 일어서지를 못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제사에 참례한 것은 금년 1월이었다. 당신의 몸은 절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죽음과 가까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의 눈에서 내가 본 것은 햇살 조각 같은 눈물이었다.
나의 네번째 소설집 '베니스에서 죽다'의 교정을 보다가 소설가의 자의식이 도처에 깔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새삼스럽게 놀란 적이 있다. 첫 작품 '은빛 동전'을 발표한 것이 1995년 겨울이고, 마지막 작품 '섬진강'을 발표한 것이 2002년 여름이니 7년여의 세월 동안 내 정신의 눈이 소설가의 자의식을 줄곧 응시하고 있었던 셈이다. 회고하건대 자의식에 깔린 지배적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 했던가? 내가 두려워 한 것은 '길 잃음'이었다.
나는 소설만큼 길을 잃기 쉬운 세계를 알지 못한다.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순식간에 길을 잃는다. 무릇 길이란 어떤 미로일지라도 다른 길과 연결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소설 속의 길은 다르다. 보이지 않는 그 길은 다른 길과는 절대 연결되지 않는다. 한 번 들어서면 되돌아오지 않는 한 다른 길로 들어갈 수 없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곳곳에서 입을 벌리고 있다. 두 겹의 길도 있다. 세 겹의 길도 있다. 네 겹의 길도, 다섯 겹의 길도 있다. 그것은 길이면서 동시에 길이 아니다. 두 겹의 혀를 본 일이 있는가? 세 겹의 혀를 본 일이 있는가? 네 겹, 다섯 겹의 혀를 본 일이 있는가? 그것을 보지 않고서는 소설이라는 불가사의한 길을 통과할 수 없다. 그것이 두려워 눈을 감는다면 조용히 무릎 꿇어야 한다. 나는 알고 있다. 언젠가는 무릎 꿇어야 한다는 것을. 유한한 존재가 무릎을 꿇지 않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아버지의 죽음을 내려다보면서 아버지가 언제 생(生)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까, 생각했다. 절을 할 수 없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보이지 않는 어떤 영혼 앞에서 온몸으로 기도 드릴 수 없을 때 조용히 무릎을 꿇지 않았을까. 그것이야말로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에게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예의이리라.
나는 생각한다. 아버지의 몸이 앙상한 새의 형상으로 변한 것은, 곡기를 끊으신 것은, 물마저 거절하신 것은 예의의 표현이 아닌가 하고.
조선의 문사에게 글은 도(道)를 담는 그릇이었다. 이 자리에서 도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따진다는 것은 적절한 태도가 아닐 것이나, 다만 오늘의 관점에서 언급한다면 '인간이 지향해야 할 삶의 가치'라고 표현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의 문사에게 글이란 '인간이 지향해야 할 삶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다.
도구의 존재 조건은 실용성에 있다. 더 좋은 도구가 나타나면 기존의 도구는 버려진다. 그러므로 진정한 문사란 서슴지 않고 글을 버릴 수 있는 자다. 이 지점에서 나와 문사는 갈라진다.
나는 문학을 도구로 보지 않는다. 목적으로 본다. 따라서 문사처럼 문학을 버릴 수 없다. '인간이 지향해야 할 삶의 가치'를 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왜 문학을 하는가'의 물음이 '왜 사는가'의 물음과 다름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연보
1953년 부산 출생 1978년 서울대 국어교육과 졸업 1983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중편 '말의 탑' 발표, 등단 소설집 '기억의 강' '완전한 영혼' '아늑한 길' '베니스에서 죽다' 장편소설 '세상의 저녁' '황금사다리' '로뎀나무 아래서' '그림자 영혼' '광야' 등 동인문학상(1995) 올해의문장상(2002)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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