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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분노의 바그다드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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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분노의 바그다드 박물관

입력
2003.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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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보스턴의 대학 박물관에서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를 처음 보았다. 거기에는 당시 시민들의 문명과 야만에 대한 생각의 편린들이 적나라하게 새겨져 있었다. 수 천년 전의 그리스인들을 만날 수 있는 기쁨과 함께 이를 한 자리에 모아 놓을 수 있는 힘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이집트의 스핑크스를 보았다. 한둘이 아니고 수십 개가 줄줄이 서 있었다. 이번에는 경외감보다는 의아함이 더 컸다. 알 수 없는 분노감도 일었다.런던 파리 그리고 뉴욕과 워싱턴의 세계적 박물관들은 '야만의 틀에 갇힌 문명'이 거주하는 집이다. 빼앗은 것보다 빼앗긴 것이 많은 작은 나라 출신인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유물들이 어떤 방식으로 수집되었든, 고대문명의 유산은 그것을 꽃피운 고향을 떠나 현재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중심국가에 더 많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것들은 제국주의 시대에 탐험과 연구라는 이름으로 전유되었거나 우월한 자본의 힘에 의해 매입된 것들이다.

근대에 이르러 서구의 민족국가는 자신의 영토 뿐 아니라 해외에서 확보한 것들을 인류문화의 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하는 장소를 만들어 박물관이라고 이름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에서도 그와 닮은 박물관들을 창출하였다. 전후 독립국가가 되는 과정에서 제3세계의 국립박물관들은 새롭게 변형되었지만, 그런 전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아마도 작년에 아프간 전쟁과정에서 상처를 받은 카불박물관이나 이번 이라크 전쟁으로 폐허가 된 바그다드의 국립박물관도 이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원래 전쟁은 정복당한 집단의 역사를 지우고 그들의 문화적 자산을 빼앗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기제이다. 아프간 전쟁으로 카불박물관과 아프간 곳곳의 비단길 문화유산이 약탈되었다. 이라크 전쟁은 고대 메소포타미아문명을 전시하고 있던 국립박물관을 폐허로 만들었다. 보물들은 물론이고 고대설형 문자가 새겨진 점토판까지 실어 내갔다고 한다. 수메르의 점토판에는 창세기의 창조설화나 홍수설화의 원형들이 기록되어 있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에서 현재의 이슬람만 보았을 뿐 과거의 고대 기독교는 보지 못했던 게 틀림없다. 문명의 전도사임을 자처하는 부시 대통령은 구약성서의 창세기 신화를 배태한, 기독교의 발상지를 파괴한 셈이 되었다.

이번 전쟁으로 독재자는 사라졌으나 그에 대한 대가는 너무 크다. 한 사람의 오만은 민간인 부녀자 어린이뿐 아니라 고대 문명을 만들어 낸 수메르인들을 죽였고, 아라비안 나이트를 읽으며 상상력을 키워가는 세계의 모든 어린이들, 또는 어린 시절 그것을 읽었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어른들의 정신세계에도 큰 상처를 주었다.

이라크의 고대 유물들은 이미 걸프전 이후부터 스위스 암시장을 거쳐 세계로 반출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번에 약탈된 문화재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뒤늦게 미 국무장관이 이에 관한 방침을 밝혔지만, 과연 그것들이 다시 이라크 박물관으로 되돌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만약 이라크인들이 용케 미국의 도움으로 전후 복구에 성공하여 다시 미국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없어진 문화재들을 어느 사설 박물관에서 발견하게 된다면, 그들이 흘릴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겠는가, 회한의 눈물이겠는가.

우리는 숱한 전쟁과 대량 살상으로 얼룩진 20세기를 야만의 세기로 불렀지만, 새로운 세기가 열린 지 불과 3년 만에 이루어진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으로 인하여 21세기 또한 반문명의 세기라는 오명으로부터 벗어나기는 어렵게 되었다. 약탈자들보다 약탈을 방치한 힘있는 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고 있지만, 이미 힘의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 아무도 실질적으로 이를 말리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21세기 초의 인류사적 불행이기도 하다.

정 근 식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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