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상처를 끌어안으니 온기가 되었다/이윤학 시집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펴내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상처를 끌어안으니 온기가 되었다/이윤학 시집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 펴내

입력
2003.04.16 00:00
0 0

'그는 안에서 긁혀 있었다./ 그 상처 때문이었지/ 들여다보는 사람 얼굴도 긁혀 있었다.'('장롱에 달린 거울'에서)상처는 거울에 난 것이었을까, 얼굴에 난 것이었을까. 이렇게 묻는 것도 상처를 이기려는 한 방식이다.

'그는 긁힌 속을 들여다보았다./ 들어가 숨기 불가능한 공간/ 들어가 숨기 쫍쫍한 공간/ 들어가 살기 위하여,/ 그는 앞으로 당겨 앉았다.'

상처를 들여다보고 그 안으로 들어가 사는 것 또한 상처를 이기려는 다른 한 방식이다. 상처로 시를 써온 시인은 처음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파먹을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밖에는 없다."

시인 이윤학(38)씨가 시집 '꽃 막대기와 꽃뱀과 소녀와'(문학과지성사 발행)를 펴냈다.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을 때 스물 다섯 살의 젊은이였던 그는 이제 다섯 권의 시집을 낸, 마흔을 바라보는 중견 시인이 되었다. 등단 13년 째 많이 변하지는 않았다. 매일 소주를 들이붓다 보니 목소리까지 축축하게 젖었다. 시간이 오래 지났어도 여전히 수줍은 목소리다. 그의 상처는 얼마나 더 깊어졌을까.

"어렸을 적 마당에 측백나무 네 그루가 있었다. 쉰 몇 살, 키가 잘리고 몸통 굵기만 키운 나무였다. 살을 비비고 진흙 속에서 뿌리로 뒤엉켜 있었던 나무 생각이 한참 만에야 났다. 나는 그 동안 곁에 붙어있는 사람들 생각을 지지리도 못했다. 벗어나지 못해 안달을 부렸다."

'사람들'이란 '상처들'의 다른 이름일 게다. 그 상처는 스스로 파먹어 난 것이다. 상처난 얼굴이 보기 싫어 '번번이,/ 거울에게 등을 보여줬던' 그이다.

그런 그가 이제 상처를 낸 칼을 감싸 안을 만큼 둥근 힘을 알게 됐다. '둥근 소나무 도마 위에 꽂혀 있는 칼/ 두툼한 도마에게도 입이 있었다./ 악을 쓰며 조용히 다물고 있는 입/ 빈틈없는 입의 힘이 칼을 물고 있었다.'('짝사랑'에서)

칼은 배를 가르고 목을 치고 몸을 토막 낸다. 한때 그의 눈길은 그 칼에만 붙잡혀 있었다. 그랬던 그의 시선이 좀더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칼 아래 도마가 있다. 칼이 꽂힌 따뜻한 나무색 도마가 시인에게는 칼을 물어서 안은 것처럼 보인다. '둥글게 파여 품이 되는 도마./ 칼에게 모든 걸 맞추려는 도마./ 나이테를 잘게 끊어버리는 도마.'

'순간'이라는 시에는 심지를 잡아 끄는 촛불과, 작은 빛이 나는 모래와, 급한 고갯길을 내려오는 참 예쁜 개가 있다. 시 한 편에 이렇게 많은 온기를 모을 수 있다니….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를 노래했던 그가 이제 눈물 흘리는 나무와 함께 울먹이기로 한다. 상처는 이렇게 극복된다. '바람에 날려 하얗게/ 손바닥을 펴 보이는 내 닥나무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것이다./ 내 닥나무에도 순간, 순간이 차곡차곡 채워지는 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한참 동안 울먹거릴 운명이/ 내게도 찾아온 것이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