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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록의 대부 신중현 (44) 미 8군, 그리고 첫 음악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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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록의 대부 신중현 (44) 미 8군, 그리고 첫 음악 공부

입력
2003.04.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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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8군 무대 시절을 생각하면 두 명의 걸출한 뮤지션이 떠오른다. 정말 대단한 실력자들이었다. 한 명은 당시 내가 속했던 패키지쇼단의 리더이자 테너 색소폰 연주자였던 신지철이다. 40대 나이였던 그가 영국 민요 '대니 보이'를 실 오스틴식으로 한 번 연주하면 미군들은 환성을 지르고 뒤집어 졌다.어느 날 그 소문을 듣고 미군 군악대에서 색소폰을 불던 한 흑인이 클럽에 찾아왔다. "당신 색소폰을 한 번 불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것 봐라' 하는 객기가 동했으리라. 색소폰을 넘겨 받은 그 친구는 두 번 놀랐다. 색소폰이라기 보다는 아예 고철통이었기 때문이다. 국산 싸구려 색소폰에 그나마 고물이니, 양 볼이 터지도록 불었으나 고무줄과 본드로 곳곳에 땜질을 해 놓은 고철통에서 소리가 날 리 만무했다. 용을 쓰더니 결국 삑 소리도 한 번 못 내고 물러나야 했다. 그런데 색소폰이 왜 그런 꼴이었던지 알게 된 그 친구는 또 한번 놀랐다. 문제는 마약이었다. 돈이 조금 생긴다 싶으면 마약에 털어 넣었으니….

또 한사람은 신지철과 명콤비를 이뤘던 '따통쟁이'라는 별명의 악사였다. 따통이란 담배통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아편중독자였던 그가 아편을 거기 넣어 두고 수시로 흡입하다 보니 별명으로 굳어진 것이다. 압권은 두 사람이 무대에 나가 색소폰을 주고 받는 피날레였다. 마약을 해서 쇠창살 신세도 몇 번 져야 했지만, 음악적으로만 보면 그들은 진정한 뮤지션이었다.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었다는 말이다.

두 사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딴 데 있다. 그들이 미군을 열광시킬 수 있었던 것은 잘 하는 사람을 따라 하기 보다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고 발전시키는 데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계적 연주자라 해도 그를 모방하지 않겠다는 고집은 나에게도 있었다. 그 같은 자존심을 갖게 된 것은 음악스승 이교숙 선생으로부터 수업을 받을 때였다. 나보다 19살 연상의 이 선생은 원래 트롬본 주자였는데, 나와 처음 만났을 당시는 서울 동작구 대방동 해군본부에서 군악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 선생과 인연이 맺게 된 것 역시 따지고 보면 내가 미군 무대에서 일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미 8군 무대에서 장사를 잘 하려면 미국 사람들의 귀에 얼른 들어가는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 관건이다. 마침 이 선생은 해군악대 단장의 신분으로 미국의 재즈 학교에서 재즈를 섭렵한 뒤였다. 스프링 버라이어티의 대행사였던 '화양'의 요청을 받아 미 8군 무대에 오를 음악의 편곡 강의를 맡게 된 것이었다. 1962년부터 일주일에 세 번 열린 그 수업 은 내 인생 중 단 한 번 있었던 음악 공부 시간이다. 그러나 공부와는 매끄러운 인연이 없었던지, 2년 과정을 3년 만에 마쳐야 했다.

물론 사연이 있다. 먼저 사고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모래내에서 동생 수현과 자취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 선생한테 강의를 들은 지 1년 반을 막 넘겼을 때였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홍제동 비포장 고개를 간신히 넘던 만원 버스가 전복돼 2m 아래 개천으로 굴러 떨어졌다. 아수라장을 빠져 나오니 오른손목이 완전히 부러져 덜렁대는 것이었다. 그 경황 중에도 이래 갖고는 기타를 칠 수 없다는 생각에 팔을 잡아 당겨 뼈를 대충 맞추고는 출동한 경찰백차에 무조건 올라탔다.

병원에 가서 급한대로 석고 깁스를 하고 40일 동안 동생이 해 주는 밥을 먹은 뒤 병원에서 톱으로 깁스를 풀었더니 뼈가 삐딱하게 붙었다는 것 아닌가. 그 길로 달려간 서대문 접골원의 말은 한술 더 떴다. 잘못된 팔을 부러뜨려 다시 붙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도 선수들이 달려들어 팔을 허벅지에 대고 억지로 부러뜨렸다. 결국 두 번 부러뜨린 셈이다.

이 선생을 다시 찾은 것은 팔을 두 번째로 부러뜨린 지 불과 2주후였다. 병원의 말도 무시하고 통증이 가시자 마자 바로 찾은 것이다. 그러나 내가 원래 속해 있었던 반은 이미 졸업하고 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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