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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비화 대통령의 사람들]<7>권력의 균열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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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비화 대통령의 사람들]<7>권력의 균열 ④

입력
2003.04.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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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비서관 인사가 있기 하루 전인 2000년 2월 29일 밤 11시, 청와대 관저로 김홍일(金弘一) 의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희호(李姬鎬) 여사가 전화를 받았다. 김 의원은 다음 날 있을 비서관 인사를 거론했다. 이 여사는 "그런 문제는 아버지하고 상의하라"며 전화를 DJ에 넘겨주었다.김 의원은 "이만의(李萬儀) 공직기강비서관과 정영식(丁榮植) 행정비서관을 맞바꾸기로 하셨습니까"라고 물었다. DJ가 "그렇다"고 말하자 김 의원은 "이 비서관은 능력 있습니다. 임명된 지 보름도 안돼 타당한 이유도 없이 바꾸면 안 됩니다"라고 재고를 요청했다. DJ는 "이미 지시를 했으니 뒤집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김 의원은 "제가 1992년 목포 지구당을 맡았을 때 목포시장을 했던 사람으로 저를 여러모로 도왔습니다. 공정하고 사려가 깊습니다. 제가 키우는 사람입니다"라며 인연까지 거론했다. 그러나 DJ는 인사 번복은 불가하다고 말하고 "앞으로 이 비서관에 대해 신경을 쓰겠다.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다"고 아들을 다독였다.

맞바꾸기 인사는 DJ가 이날 오전 국무회의에서 '특정고 인맥'을 언급했을 때 예고돼 있었다. 당시 한 참석자는 "대통령의 표정이 워낙 굳어있어 서늘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특정고 언급은 다음과 같다. "과거 군사정권 시대에 경북고 나온 사람은 무슨 특권처럼 행세했다. 그 다음에 경남쪽에서 그런 일이 있었고 서울의 어떤 고교도 그랬다. 요새는 호남의 일부 고교에서 이런 경향이 약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고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이런 일에 대해 오늘까지 참겠다. 오늘 이후로 그런 일이 있으면 책임져야 한다."

국무회의 후 한광옥(韓光玉) 비서실장은 DJ의 지침을 받아 이만의(행시 11회), 정영식(10회) 두 비서관을 맞바꾸기로 했다. 신광옥(辛光玉) 민정수석과 이만의 비서관이 광주 일고 선후배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인사의 주무 라인을 동일 고교 출신이 장악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한 실장은 신 수석에 이를 통보했고, 행정비서관이 정무수석실 소속이어서 남궁진(南宮鎭) 정무수석에게도 알렸다. 신 수석의 반발, 남궁 수석의 만류가 있었지만 대세를 돌릴 수는 없었다.

영문도 모르던 이만의 비서관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밤 늦게 김홍일 의원을 찾아가 억울함을 하소연하며 지원을 부탁했다. 그래서 김 의원이 DJ에 전화를 걸어 이 비서관의 유임을 건의했던 것이다. 이 비서관은 DJ와 김 의원의 통화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구명' 노력을 포기했다.

이 비서관의 교체로 특정고 언급은 일단 광주 일고 인맥을 겨냥한 셈이 됐다. 이 일을 계기로 신 수석의 위상은 곤두박질쳤다. 신 수석은 대검 중수부장으로 김태정(金泰政) 전 법무장관과 박주선(朴柱宣)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옷 사건과 관련해 구속시킨 뒤 청와대로 올 때만해도 기세가 등등했다. 하지만 취임 두 달도 안돼 자신을 방어하기에 급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DJ의 특정고 언급과 비서관 교체는 그 때나 지금이나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이 언급은 느닷없이 나온 것이었다. 청와대 비서실이 사전에 준비한 말씀자료에 들어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혀 예상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두고 '인사편중 시비 차단' '특정고 파벌 움직임에 대한 경고' 등 해석이 분분했다. "공직 인사를 둘러싸고 광주일고, 광주고, 목포고, 전주고의 다툼이 곳곳에서 전개돼 DJ가 이를 문제 삼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런 분석들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DJ가 어디서, 어떤 정보를 입수해 그처럼 강한 조치를 취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한 시사잡지는 "비서실장실에서 3급 이상 공직자의 인사파일을 요구했는데 민정수석실이 이에 협조하지 않아 한 실장이 DJ에 이를 보고, 인사조치를 했다"며 '양(兩) 광옥(한광옥-신광옥)'의 갈등설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가설은 사실이 아니었다. 한 실장의 측근 P씨는 "그 때 그런 인사 파일을 요구한 적도 없지만 실장의 자료 요구를 수석이나 비서관이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한 실장도 그 때는 정확한 전말을 몰랐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와대 핵심인사 몇몇은 그 이면에 권노갑(權魯甲) 고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권 고문은 동교동계가 김중권(金重權) 비서실장 시절 인사에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던 상황이 재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직기강 비서관에 자기 사람을 심고자 했다.

권 고문이 그 일환으로 제일 먼저 꺼낸 카드가 민정비서관실 장홍호 행정관(국장)이었다. 장 국장은 DJ의 야당 시절 경호팀으로 입문, 권 고문 수하에서 활동한 측근이었다. 그러나 권 고문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한광옥 실장은 "그 자리는 각 부처를 포함 정부기관의 업무를 잘 알아야 하고 공직자들의 면면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 장홍호는 당 출신이어서 이에 적합하지 않다"고 거절했다. 이런 이유로 권 고문의 추천과는 달리 내무부 관료로 제2건국위 기획운영실장을 맡고 있던 이만의씨가 공직기강비서관으로 가게 된 것이다.

이 때 권 고문은 "인사 라인은 엄정해야 하는데 광주 일고 출신이 이를 독점,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를 전한 공직자들은 주로 권 고문의 동향인 목포 출신이었다. 권 고문은 DJ와 독대할 때 이 문제점을 지적, 목포 출신인 정 비서관을 인사 라인에 앉혔다는 게 청와대 인사들의 전언이다.

이만의 비서관의 증언. "공직기강비서관에 임명된 후 주변의 권유로 권 고문을 찾아가 인사를 했다. 그러나 권 고문은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왜 그런지 이유를 몰랐는데 당시 권 고문은 '그 자리에는 우리 쪽(목포) 사람이 가야 한다'고 아쉬워했다고 하더라. 광주 일고의 인사라인 독점 문제도 권 고문이 제기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신 수석으로부터 들었다."

그렇다고 DJ가 권 고문의 입지 확대를 위해 특정고 문제를 제기했다고 볼 수는 없다. 연고주의를 배척하라는 원론적이고 포괄적인 경고였고 공직기강비서관 교체는 그 본보기였다는 게 한 실장 등의 설명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파문을 통해 권 고문의 영향력이 확대된 것만은 분명하다.

청와대가 김중권 비서실장과 박주선 법무비서관 등 이른바 신주류 체제로 짜여져 있을 때 권 고문은 공직 인사와 관련한 부탁을 한 적이 없다. 차단 막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신주류가 물러난 이후에는 권 고문의 인사 개입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권 고문 본인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권 고문의 얘기. "2000년 4·13 총선의 낙천자들을 주로 챙겼다. 낙천자 26명 중 22명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은밀하게 하지 않고 이력서를 한광옥 실장과 신광옥 수석에 전하면, 청와대가 자리가 생기는 대로 낙천자들을 우선적으로 임명해주었다. 오랫동안 대통령을 모셔온 당료들도 공기업 등에 보냈다."

DJ도 권 고문의 막후 역할을 인정했다. 권 고문이 2000년 2월 상임 고문으로 민주당에 상주하고 4·13 총선 공천에 관여한 것도 DJ의 허락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DJ는 옷 로비 사건의 광풍에 시달리면서 김중권 실장 체제가 한계에 달했다고 판단, 1999년 11월 말 김 실장과 박 비서관을 퇴진시키고 그 공백을 동교동계가 맡도록 했다.

동교동계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김중권 체제를 향해 끊임없이 제기됐던 정당성 시비는 사라졌다. 평생을 DJ에 헌신했던 '동지'들의 소외감도 누그러졌다. 그러나 '형님과 동생'의 돈독한 관계는 견제력을 약화시켜 임기 말 정권을 코너에 몰고 갔던 각종 비리를 예방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특히 신광옥 수석의 추락은 정권의 '정수(淨水) 시스템'을 고장 나게 만들었다. 신 수석은 특정고 파문 이후 권 고문과 대통령 아들들을 감시하기 보다는 이들과 잘 지내는데 주력했다.

민정수석실의 이상(異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 하나. 2000년 후반 청와대 출입기자 A씨가 민정수석실에 들렀을 때 권 고문의 측근인 장홍호 국장이 대기하고 있었다. "어떻게 왔냐"는 A씨의 질문에 장 국장은 "신 수석이 정치를 잘 몰라 한 수 가르쳐드리려고 왔다"고 말했다. 이 말은 사무실 안의 신 수석도 들을 수 있는데도 장 국장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는 민정수석실의 시스템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적신호였지만 그 누구도 이를 지적하고 개선하려 하지 않았다. 임기 말 DJ 정권의 어려움은 이런 삽화 한 장면에서 예고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영성 기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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