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주요 서방 강국들과 세계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강행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다. '고독한 초강대국' 미국의 지도자 부시는 '자유의 투사' 역할을 더욱 고집스럽게 자임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눈에 거슬리는 나라라면 시리아이든 이란이든 좌시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다. 이번 전쟁을 거치면서 9·11 테러 사태 이후 미국의 강공 드라이브에는 한껏 힘이 실려있다.개전 한 달이 채 못되어 거둔 미국의 승리는 동북아 지역에도 '바그다드 효과'(Baghdad effect)를 발생시키고 있다. 미국의 적나라한 힘과 '막가파식' 접근법에 어쩔 수 없이 적응하는 분위기가 동북아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외신보도도 있다.
지난 14일 북한이 핵 문제 해결을 위한 다자대화의 틀을 수용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은 교착상태에 빠진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긍정적인 변화임에 틀림없다. 북한은 체제 경직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외교적 유연성을 지니고 있다. 상황을 벼랑 끝까지 몰아가면서 현실적 실리를 챙기되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극적인 타협의 카드를 불쑥 내밀어 상황반전을 노리는 패턴을 반복한다. 그것이 '비합리적 합리성'이든 '타산적 맹목주의'이든 말이다. 어쨌든 미국은 바그다드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북한의 태도변화는 의미심장한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은 이 변화를 긍정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세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북한과 이라크가 다르다는 것이다. 군사개입과 관련, 이라크가 파나마 수준이라면 북한은 베트남 수준이라는 것이 미국 군사 관계자들의 판단이다. 둘째는 첨예한 이해 당사국인 한국의 입장을 무시할 수 없다. 미국은 주변 아랍국들의 비협조 속에서도 이라크침공을 강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의 경우 한국의 비협조 속에서 미국이 평양에 들어갈 순 없다. 한국의 위상이 다르고 한국의 대통령이 다르기 때문이다. 셋째, 주변 강대국들의 반발이 보통 수준을 넘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 2위의 정치적 강자로 이미 떠오른 중국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우호관계 속에서 북한의 후견자적 기능을 수행해오고 있다. 이런저런 배경으로 볼 때 미국의 북핵 문제 해법은 대결보다는 대화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항상 그렇듯이 전쟁이 허무한 것이라면 대화는 피곤한 것이다. 대화상대가 까다로운 관계일 때의 대화는 더욱 아슬아슬 할 수 밖에 없다. 포도주 잔보다 더 깨어지기 쉬운 것이 대화다. 특히 한반도 문제에 관한 이해 당사자들간의 대화는 까다롭고 아슬아슬하기가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다자대화 방식이라고 하지만 어떤 나라들이 참여할 지부터 순탄치 않다. 미국은 러시아의 참여를 내켜하지 않고, 북한과 중국은 여전히 북미대화의 병행을 선호하고 있다. 대화 테이블에서 무엇을 얘기할 것인지도 간단치 않다. 이 문제와 관련해 공세적 이니셔티브를 쥔 미국은 북한에 모든 핵 가능성의 완벽한 포기를 요구해왔다. 반면 수세적 이니셔티브를 쥔 북한은 자신에 대한 미국의 적대정책 포기 문제에 집착해왔다.
물론 아직도 최악의 시나리오는 살아있다. 미국과 북한이 위험한 군사적 충돌을 할 가능성은 한반도에 상존한다. 그러나 지금 북한과 미국은 어느 한 쪽의 완승으로 끝날 수 있는 일방적 상황에 있지 않다. 이것은 분명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양국이 모두 돌이키기 어려운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북미 관계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다. 전쟁의 대가를 생각한다면 북한과 미국은 대화의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부시 미 대통령이 어떤 합리적 선택을 해갈지 이제 세계는 이 두 지도자를 주시하고 있다.
황 주 홍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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