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화(76) 할아버지의 외출가방에는 늘 영양갱 하나와 빗이 들어있다. 어디를 가든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는 할머니를 먹이고 빗겨주기 위해서다. 내년이면 금혼식을 올리게 되는 이 부부는 정말 한 시도 떨어져 지내는 법이 없다. 젊은 시절부터 '잉꼬부부'로 소문날 정도의 유별난 부부애만은 아니다. 3년 전부터 치매증세를 보이는 할머니의 시중을 들어주기 위해서다. 공간감각이 사라진 할머니는 몇 발자국도 채 걷지 못하고 넘어지기 때문에 늘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아이스크림을 유달리 좋아하는 할머니가 옷을 더럽힐 새라 휴지를 들고 옆에서 대기하는 것도 그의 역할이다. 먹이고 씻기고 입히는 등 모든 시중을 드는 그는 '아기 키우는 심정'이다.서울에서 살다 6년 전 양평으로 옮긴 것은 할머니가 간암진단을 받으면서였다. '간암에 버섯이 좋다'는 말을 듣고 재배기술을 익혀 직접 재배하기 시작했다. 할머니 식성에 맞추기 위해 한식 일식 제과 제빵 등 요리사자격증도 7개를 땄다. 양식과정은 어려워서 8번 떨어지고 포기했다.
하지만 3년 전부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치매증상이 나타났다. 방금 들은 말을 잊어버리고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천상 여자였다"는 할아버지 말대로 남편에게 고분고분했고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못했던 할머니가 딴 사람이 된 듯이 화를 내고 물건을 집어 던졌다. 외출을 할 때 운동을 시키기 위해 지하철 계단을 억지로 걷게 했더니 평생 입에 올려본 적이 없는 욕을 했다. 밤중에도 몇 번씩 자다 깨다 하기 때문에 함께 잠을 설치기 일쑤다.
가장 어려운 것은 씻기는 일. 옷을 벗지 않으려고 해 몇달 동안 씻기지 못한 적도 있었다. 요즘은 인근 교회의 자원봉사자들이 방문, 목욕을 시켜주는 덕에 짐을 하나 덜었다. "아마 남편 앞에 옷을 벗는 것이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 같다"는 말처럼 지금도 남편이 방에 있으면 화를 낸다.
'치매환자의 심리를 이해하면 돌보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는 것이 그의 지론. 처음에는 할머니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치매에 대한 일본·미국원서를 구해 읽으면서 점차 '치매환자 다루는 법'을 터득하게 됐다. 그는 "치매환자도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일을 저질렀을 때 화를 내거나 일일이 고쳐주려고 하면 상태가 더 나빠진다. '맞다' '잘했다'고 추켜주는 것이 환자를 안정시키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할아버지의 사랑과 적절한 간호방법 덕분인지 할머니는 치매가 상당히 진행됐는데도 겉으로는 멀쩡해 보인다. 이를 두고 그는 "평소 성품처럼 노망도 곱게 들었다"고 웃는다. 주위에서 "할머니에게 너무 잘 한다"는 말을 듣게 될 때마다 "젊었을 때 아내가 나한테 한 것의 절반도 못 따라간다. 젊었을 때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것 일 뿐"이라고 말한다.
오랜 익은 사랑이 깊다고는 해도, 70대 중반의 나이인 만큼 치매환자 돌보기가 힘겨울 때도 적지 않다. 밤중에 집을 나가 배회하는 할머니를 찾아 온 동네를 헤매 다닌 뒤 퇴행성 관절염이 심해졌다. 이러한 박씨에게 무엇보다 큰 힘이 되는 것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이다. 지난 해부터는 한 달에 한 번씩 할머니를 데리고 치매가족들의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
다른 가족들이 "왜 나한테 이런 고통이 찾아왔나" 며 울고불고 하면 그는 "치매환자는 아기와 같다. 아기가 잘못을 저지르는데 화를 낼 수가 있겠는가"고 오히려 달랜다. 치매가족협의회 김미송 간사는 "박씨의 달관한 태도가 다른 치매가족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전한다.
/김동선기자 ween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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