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부의 한 사립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레이건 정부의 감세정책과 보호무역주의를 비판하는 강의를 했는데, 학생들의 반응이 영 심상치 않은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학기말 평가는 동양인 교수의 자유주의를 비아냥거리는 것이 주종을 이루었다. 필자로서는 신기한 일이었다. 동부나 서부의 대학에서는 파티 농담처럼 가볍게 받아들여질 내용이었는데…. 대학 캠퍼스에 그렇게 많은 공화당 지지자가 있는 것도 신기했다.말썽 많은 이라크 전쟁이 이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바그다드가 함락된 뒤에도 여전히 대량 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계속해서 이 전쟁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전 미국인이 공화당원이 된 듯하다.
이러한 미국인의 정서를 전부 9·11 사태 때문으로 돌리기는 힘들다. 미시간대가 발표하고 있는 '세계 가치관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국가와 종교에 대한 열정은 유럽의 선진국은 물론 우리 나라의 수준도 능가하고 있다. 최고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을 누리는 미국인들이 베트남과 터키에 버금가는 국가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신기하기만 하다.
상대주의와 개인주의에 희석되지 않은 적나라한 애국심이 팍스 아메리카나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세계정치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경제에 있어서도 매우 불행한 일이다. 이번 전쟁은 여러 개발도상국에서 보호무역주의자의 입지를 강화시킬 것이다. 전쟁과 제국주의만큼 약소국에서 쇄국과 자립의 심리를 자극하는 것은 없다.
이번 전쟁으로 반세계화 운동도 더욱 거세질 것이다. 군사문제와 경제문제를 분리해 생각하여야 한다고 주장해봐야 큰 설득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번 전쟁의 배후에는 경제적 이익 문제가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일개 국방부 관료가 유럽의 정상을 비웃는 발언을 하는 현 상태가 지속되면 미국과 유럽의 공조로 가까스로 탄생한 도하라운드 협상도 위태로울지 모른다.
이 전쟁은 우리 나라에서도 역시 반개방론자의 입지를 강화시킬 것이다. 우리 쪽에서 상당한 빌미를 제공해 준 하이닉스 반도체의 상계관세 문제도 앞 뒤 가릴 것 없이 미국의 완전한 일방주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비스시장 협상의 전초전에서 이미 밝힌 개방의 수준을 확인해 준 것에 불과한 교육시장 개방도 미국에 굴복한 망국의 개방으로 해석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우리의 최고위 관료가 투자유치를 하기 위해 미국에 가고 재경부가 한미 투자협정의 성사를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 영화계는 스크린 쿼터를 놓고 한판 승부를 준비하고 있다. 스크린 쿼터 사수 운동의 중심에 있던 영화계 인사가 대선의 공로자이며 문광부 장관이 된 상황에서 이 전쟁은 영화계의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 줄 것이다. 수 년 안에 관세화할 수밖에 없는 쌀수입은 앞으로 어떤 파고를 우리 사회에 일으킬지 암담하기까지 하다. 그 수혜자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고 우리의 쌀소비자라고 말해 보아야 소용없는 일일 것이다.
시장개방은 미국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증명하려고 애를 쓰는 필자의 수업에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이 점점 줄어가고 있다. 선생님이 너무 순진한 것 아니냐는 표정들이다.
국제 시장에서 보호무역 노선을 견지한다면 우리는 결국 세계 경제에서 따돌림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이를 국민에게 설득하는 일은 정부의 몫인데, 미국이 이것을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다. 시장 개방의 문제는 파병보다 훨씬 골치 아픈 문제를 현 정부에게 안겨 줄 것이다. 미국이 미국식 자본주의의 전파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송 의 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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