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1월 13일 한인들이 하와이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그 누구도 100년 내에 한인들이 미국 의학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될 줄 몰랐다.2002년 12월 현재 재미 한인의사협회(KAMA)에 등록된 회원은 5,000여명. 미국 내 의학분야 박사학위 취득자 8,000여명 중 한국으로 돌아간 3,000명을 제외한 숫자다. KAMA는 화학, 생명공학, 약학 등을 전공한 의학자까지 합하면 미국 의학계의 한인은 최소 1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미 버클리 대학 화학과 김성호(65) 교수는 한인들이 의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를 묻자 “한국인이 의학 분야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유전자를 따로 가지고 태어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역시 교육과 노력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인들의 뛰어난 적응력과 미지의 분야에 과감히 도전하는 용기도 성공 요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고 전했다.
그래서일까. 한인들 중에는 현대 의학의 불치병인 암과 에이즈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가 많다. 미국 최고의 의과대학인 존스 홉킨스 의대 종양외과 문철소(37) 박사는 ‘세계 의학계에서 암 정복에 가장 근접한 인물’로 꼽힌다.
물 흡수 조절을 관장하는 유전자인 아쿠아포린을 발견한 것은 미 의학계에서 생리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정도의 업적으로 평가받았다.
2001년 동양인 최초로 이 대학의 종신 교수로 임명됐고, 현재 종양외과와 이비인후과 교수, 폐암ㆍ식도암ㆍ두경부암 연구센터 책임자를 맡고 있다.
1991년 서울대 의대에서 인턴 과정을 마치고 96년 존스 홉킨스 의대에서 유전학과 분자생물학 박사를 딴 뒤 암의 정체를 규명하는 험난한 여정에 뛰어들었다.
홍완기(61) 박사는 한국의 모 재벌기업 총수를 치료한 것으로 한국에도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세계 최고 수준의 암 전문 병원인 텍사스 의대 MD 앤더슨 암병원 내에서도 암 분야 최고 책임자인 종양내과 부장이다.
암 분야에서 미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암 연구학회(AACR)의 로젠탈상을 받았고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이 학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이민 1세대다.
정재향 미 국립보건원(NIH) 연구위원은 암 억제 유전자의 신호 전달 체계를 밝혀내 유방암과 난소암의 치료 가능성을 제시했다.
암 억제 유전자인 브라카1이 활성화해 발암 기능을 하는 매커니즘을 밝혀냈다. 버클리대 화학과의 김성호(65) 교수는 구조 생물학이라는 분야를 새로 개척했다.
가장 큰 업적은 암을 유발하는 단백질인 라스의 3차원 구조와 세포주기를 통제하는 CDK 단백질의 입체 구조를 밝혀낸 것이다. 생체 고분자 결정 구조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로 통한다.
세계 최대 제약회사인 머크사의 연구개발을 총괄하는 사람도 한인 2세인 피터 김(43ㆍ한국명 김성배) 부회장이다. 그가 에이즈와 독감 바이러스가 인체 세포막에 침입하는 경로를 규명한 것은 에디슨의 전기 발명에 필적하는 의학 혁명으로까지 인정받고 있다.
그는 87년부터 15년 동안 MIT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미 생화학회가 수여하는 일라이 릴리 상과 단백질학회의 듀폰 머크 상을 받았다.
머크사 산하 머크 연구소의 수석부사장 역시 한인인 데니스 최(49ㆍ한국명 최원규) 박사다. 뇌와 척수 손상의 원인이 되는 신경세포 사멸에 대한 연구로 파킨슨병과 뇌졸중 치료법에 대한 세계적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하버드대학에서 약리학 박사를 땄고 머크사 이전에는 워싱턴 의대의 신경과 과장으로 있었다.
NIH 연구위원인 이서구(59) 박사는 세포 신호 전달 체계 연구분야의 세계적 대가다. 65년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72년 미국 가톨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딴 직후 NIH로 옮겨 30년 동안 이 분야 연구에만 몰두했다. 89년 세포 내 신호 전달과 관계 있는 인지질분해효소(PLC)를 규명해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네이처, 사이언스 등 권위 있는 국제 저널 발표 논문 수가 250편을 넘는다. 이 외에 앨라배마 대학 병리학과의 남문희 교수와 NIH의 김용석 연구위윈도 각각 에이즈와 암 분야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뉴욕=최문선 mailto:moonsun@hk.co.kr
■ "적절한 평가 이뤄지면 2010년내 노벨의학상"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에 이어 한국인이 두번째 노벨상을 타게 된다면 의학상일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국내 의학계에서는 “국제 학계에서 적절한 평가만 이뤄진다면 2010년 안에 한인 수상자가 나올 것”이라는 분석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한국보다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인들이 수상 가능권에 근접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 환경과 투자 규모 면에서 재미 학자들이 월등히 유리하기 때문이다.
전 대한의학회장인 지제근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병리학)는 “국내 의학계는 기초 분야에 대한 투자가 미미하고 응용 분야에 치중하기 때문에 발전 속도가 느리다”며 “당장의 사업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연구비 한 푼 조달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지 교수는 “의학 뿐 아니라 다른 기초 과학 분야도 다르지 않다”며 “이런 이유에서 미국의 한인 의학자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고 말했다.
과학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일본 조차 미국 MIT의 도네가와 스스무(利根川進) 박사가 유일한 노벨 의학상 수상자(1987년)이다.
한국인의 노벨 의학상 수상을 언급하는 것이 시기상조라는 지적도 있다. 미 버클리대 화학과 김성호 교수는 “한국에 알려진 몇몇 의학자들의 능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과대 포장된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김 교수 역시 한국에서 거론되는 노벨상 수상 기대주 중 한 사람이다.
김 교수는 “한국은 서양 의학 도입 역사가 짧아 이제 겨우 세계 수준의 학자 1세대가 배출되고 있다. 오랫동안 의학계의 ‘스타’를 기다려 온 심리가 섣불리 노벨상을 기대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적어도 3, 4세대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이라며 “중요한 것은 노벨상 수상이 아니라 의학 등 전문 분야에서 활약하는 한인들로 인해 미국의 한인 사회는 물론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최문선기자
■ 뉴욕성 빈센트병원 신용택박사
“공부 잘해서 주류 사회에 들어갔다고 자신의 뿌리를 잊고 한인 사회와 담을 쌓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미국 뉴욕 맨하탄에 있는 성 빈센트 병원 심장수술 과장 신용택(39ㆍ사진) 박사는 일부 ‘잘 나가는’1.5세와 2세들이 정체성을 잊고 사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성공은 포기해도 한국인의 정체성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한인회 등을 통해 어린 학생들에게 부족하나마 성공 비결을 강연하는 것도 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1975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신 박사는 미 의학계에서 최소침습시술(minimally invasive)을 이용한 최신 심장수술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인정 받고 있다. 최소침습시술은 내시경 등을 사용, 수술 시 절개 부위를 최소화해 대량 출혈을 막고 회복을 빠르게 하는 고난도의 수술법이다.
신 박사는 코넬대학에서 스페인어 학사와 의학 박사 학위를 따고 동양인 최초로 하버드대학 부속병원의 흉부외과 레지던트와 펠로우십 과정을 마쳤다.
99년부터 3년 동안은 워싱턴대학 의료센터에서 최연소 의대 교수로 재직했다. 성 빈센트 병원으로 옮긴 것은 2001년 7월. 연봉이나 근무조건이 월등히 좋은 코넬 대학에서 끈질긴 구애를 계속했지만 그는 카톨릭계 재단이 운영하는 성 빈센트 병원을 택했다.
이 병원은 ‘빈자들의 병원’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열악한 근무 조건 때문에 의사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은 곳. 신 박사는 실제 2년 째 하루 19시간을 병원에서 보내고 있다. 집도하는 수술 건수도 맨하탄에 있는 다른 병원의 3, 4배에 이른다.
“당시엔 유명인사가 돼 각종 행사에 참석하느라 진료는 뒷전인 의사들을 보고 회의를 느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보험이 없는 가난한 환자들에게도 기꺼이 수술을 해 주는 이 병원을 발견한 겁니다. 처음엔 주위 사람들이 ‘너 미쳤구나’하는 반응이었죠.”
신 박사는 이 같은 ‘봉사’가 한인사회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다. “한국인은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 집단이기주의자”라는 미 주류사회의 편견을 깰 기회라는 것이다.
신 박사는 “미국 사회에서 차별은 엄존하며, 그 벽을 깨는 방법은 교육 뿐”이라며 “내가 현재 누리는 모든 것은 3남매의 비싼 학비 때문에 기꺼이 집까지 팔았던 부모님 덕분”이라고 말했다.
/뉴욕=최문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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