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에 겪은 일입니다. 영국 옆 아일랜드라는 작은 나라에 유학 갔을 때입니다. 천년 넘게 영국의 식민지로 있었고 아직도 북아일랜드는 식민지 상태에 있는 전체 인구가 300만 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미 그 당시 의과대학은 4개나 있었습니다.유서 깊은 수도 더블린의 정반대편인 대서양쪽 작은 도시 골웨이는 인구가 4만 명(현재 6만 명) 정도인데도 대학은 150년의 역사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소위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는 세월의 고통 때문에 두 번이나 의과대학에서 제명을 당하고 늦게 다시 시작한 공부인데다 외국에서의 대학생활이라 적응하기가 쉽지않았지만 어렵게 얻은 기회를 감사하면서 지냈습니다.
어느 날 저녁을 먹다가 무료로 배달되는 지역신문을 보았습니다. 헌혈을 받는다는 박스광고가 자그마하게 실려 있었습니다. 헌혈을 받는 곳은 초등학교이고 시간도 저녁 7시부터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산보 삼아 어슬렁거리며 찾아가 보았다가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날 꼬박 2시간을 기다리고 나서야 헌혈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길게 줄을 지어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니 대부분 온 가족이 함께 나온 것 같았습니다. 헌혈을 하는 사람과 같이 온 사람들이 임시로 만든 침대를 둘러싸고 앉아 소풍 나온 것처럼 이런 저런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헌혈을 받는 사람들 역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이어서 자기 일이 끝난 뒤에야 헌혈을 받는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습니다. 길거리에 버스를 세워놓고 가운을 입은 사람이 지나가는 이를 붙잡는 풍경에 익숙한 제게 이 새롭고 낯선 풍경은 눈으로 봤음에도 좀처럼 믿기지 않았습니다. 헌혈은 1주일동안 저녁에만 이루어 졌습니다.
아일랜드 의대에서는 여러 곳으로 실습을 다닙니다. 그러다가 바리나스로우라는 작은 도시에서 실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구가 1만 명을 겨우 넘는 것으로 기억하는 데 비슷한 헌혈광고를 보고 찾아갔다가 겪은 일은 골웨이 때와 똑같았습니다. 그곳에서도 거의 2시간을 기다린 뒤에야 헌혈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연필 두 자루를 기념품으로 받아 들고 돌아오면서 이 작은 나라와 우리나라가 자꾸 비교되어서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군대에서 장병들을 대상으로 헌혈을 받으면서도 항상 피가 모자라는 우리와 헌혈로 모은 피를 다른 나라에게 지원해주는 나라. 근무시간 중에 헌혈을 권유하는 나라와 퇴근 후에 가족이 모여 줄 서서 기다리며 헌혈하는 나라. 골웨이는 아일랜드에서 3번째 큰 도시였지만 병원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처음 타는 노인들을 안내해 드려야 하는 했을 정도였습니다. 물질적 풍요만 본다면 우리가 앞섰다고도 할 수 있죠 하지만 삶의 수준에서는 뒤떨어져 있다는 자각을 뜨겁게 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우리가 얼마나 나아졌을까요?
양길승(의사ㆍ원진노동자건강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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