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내고장에선] 충남 서산시 팔봉면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내고장에선] 충남 서산시 팔봉면

입력
2003.04.14 00:00
0 0

충남 서산시내를 관통해 만리포로 내닫던 32번 국도가 지방도 634호선과 만나는 어름. 오른 편으로 제법 암팡지게 선 산이 나타난다.팔봉산(八峰山 ㆍ361.5㎙)이다. 차령 연봉에 든다고는 하나 강원도 준령에는 댈 것이 아니고, 바위 인 주봉이 운치가 있다지만 ‘똑딱선 기적소리’ 좇아오던 여행객이 샛길로 빠져 찾아들 리는 없을 터.

그래도 산 아래 뜸 주민들에게는, 산불 한 번 난 적 없고 물 한 번 마른 적 없는, 영산(靈山)이고 성산(聖山)이다. 소리 소문 없이 오가는 등산객이 1년에 못해도 10만 명은 채운다는 그 산을 밑천 삼아, 산 아랫마을 주민들이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마을 살리는 일인디 이 정도는 해야쥬”

서산 15개 읍ㆍ면ㆍ동 가운데 아파트는 고사하고 다세대 한 채가 없는 ‘촌스런’ 동네가 팔봉면이다. 팔봉산을 베고 앉은 양길2리도 6월 감자와 가을 양배추 농사가 주업.

해 걸러 밭을 갈아 엎고, 조합 빚에 쫓겨야 하는 주민들은 봄이면 나물 뜯고, 여름ㆍ가을로는 감자ㆍ고구마 캐다 등산로 입구에 전을 펴고 산다.

9일 오후 팔봉산 진입로. 10여 명의 마을 아낙들이 민들레에 머위, 돌미나리, 느릅나무 뿌리 등속을 펴고 앉았다. 산과 논밭 둑에서 갓 캔 것들이다.

“운 좋은 날은 3만원도 쥐지만, 없을 때는 그냥 돌아갈 때도 많쥬. 접 때는….”밭일 없는 날이면 빠짐없이 나온다는 한 아주머니의 사설이 길어지자, 곁에 앉았던 이가“그래 봐야 제우(겨우) 품값이유”라고 퉁명스레 자른다.

등산객이 많은 화ㆍ목ㆍ일요일에는, 주민 30여 명이 저마다 정한 자리에 전을 펴 웬만한 시골 읍장(場) 행세는 한다고 했다.

그 마을 주민들이 최근 ‘큰 마음’을 냈다. 큰 길에서 등산로 주차장에 이르는 3㎙ 폭 1.1㎞ 농로를 8㎙도로로 확장하자는 면의 제안을 받아들여 집집이 도로 곁 밭을 찢어내기로 한 것. 도로를 넓혀 관광버스를 불러 모으고, 돈을 떨어뜨리고 가게 하자는 제안이다.

마을 18가구는, 거래는 없다지만 산 진입로라고 평당 5만~18만원씩 하는 밭을, 많게는 130평 적게는 40평씩 희사하는 문서에 도장을 찍는 중이라고 했다.

싫은 소리는 없었냐고 묻자 마을 번영회장 지선하(48)씨는 “자발적으루다 헌 거라 크게 뭐 저거헌 거는 없었다”고 했다. 새마을 지도자 김준경(58)씨는 “마을 살게 허자고 면에서 생각 낸 일인디 그 정도는 해야쥬”라며 거들었다.

소나무가 워낙 성해 가을 단풍이 별로라는 지적에 따라 주민들은 지난 달 번영회 기금을 덜어 적단풍 500주를 심었다. 등산로와 임도 8㎞를 단풍으로 가꾸면 가을에도 제법 볼만 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해 평가에서 탈락하긴 했지만 2년 전까지만 해도 국립지리원이 뽑는‘전국 100대 명산’에 들었다는 게 이범주(52) 면장의 설명.

“산을 산으로만 안보고 화장실이고 주차장을 평가에 치니께 탈락헌 겨.”“근동에서는 제일 높고, 서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이런 산은 전국 어디에도 없을 뀨.”주민들은 산은 명산인데 사람이 덜 가꿔서 대접을 못 받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최근 면과 함께 등산로도 정비하고 식수대와 벤치를 갖춘 쉼터도 마련했다. 집집이 추렴한 음식에다 아래뜸으로 이사 든‘가든집’에서 인사를 대신해 올려보낸 돼지고기 스무남 근으로 마을 잔치가 벌어졌던 단풍 울력날, 주민들은 단풍 식수를 해마다 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마을이 생긴 이래 산 울력은 처음이라고 했다.

●팔봉의 승부수, 감자와 매실

지난 해 6월에는 팔봉면 최초의 손님맞이 축제인‘제1회 감자 축제’를 열었다. 면 전체 1,400여 가구 중 460여 농가가 짓고 있는 대표 작목이고, 포실한 맛이 어디 감자보다 경쟁력이 있다고 내세울 만 했기 때문이다. 한 주민은 “아는 사람은 알아주는 게 팔봉감자유.

근디 가락동 시장가면 다른 디보다 값을 더 받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빠지니 환장할 노릇 아니겄슈?”출향민 성금과 시ㆍ면 예산을 끌어 모은 7,000만원으로 전시회, 시식회 등 행사를 벌였고 배일호, 이박사 등 연예인도 6명이나 초청, 구색을 갖춘 축제였다고 했다.

행사 이틀동안 1만여 명이 왔고, 마늘 등 농작물과 가로림만 황금어장의 수산물까지 충실히 선전했으니 성공이라는 자평. 하지만 예산이 동나 축제는 격년제로 하는 대신, 올해는 감자캐기 체험행사만 벌일 참이다. 지난 해 워낙 성황이어서 관광객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겠기 때문이다.

“참가비 3,000원씩 받고 10㎏들이 한 박스씩 캐가도록 했으니 예산이 남았겄슈? 박스 한 장 값만도 1,500원이유.” “한 박스만 캐 가남유. 비닐봉지까지 들고와 채워가도 인심상 워찌 말리겄슈.”면 관계자는 “올해는 박스를 비닐봉지로 대체해 경비를 줄일 참”이라고 했다.

하지만 면의 진짜 승부수는 ‘매실’이다. 사과 배보다 손도 덜 가고, 6월이면 수확하는 만큼 갯마을 태풍에 낙과 피해도 없겠기에 선택한 이른 바 마을 주력 대체작목이다.

관광객을 쓰레기만 버리고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즉‘님도 보고 꽃도 딴다’는 구상이기도 하다. 마을 주민들은 면 공무원들과 함께 매실로 유명한 섬진강 마을 견학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고 했다.

면은 지난 해부터 시의 지원을 받아 관내 22개 마을 중 팔봉산을 두르고 앉은 15개 마을 130여 농가에 2만4,000여 주의 매실 묘목을 무상 불하했다.

5년간 5만주를 심고, 작목반을 영농법인 형태로 전환해 매실 차나 농축액 등 가공공장도 세워 볼 참이다. “과실농사는 처음이라 불안허쥬만, 천당 지옥을 오가는 양배추 시세에 평상(평생)을 목매달 순 없잖유.”지난 해 심은 청매실 홍매실에 벌써 꽃이 왔다며 반색하던 양길1리 안동석(50)씨는 “심고 3, 4년이면 한 나무에 10만원 소득은 된다니 힘 닿는데 꺼정 해봐야쥬”라고 했다.

몰라서 그렇지 팔봉산을 자세히 뜯어보면 아홉 개 봉우리라고 했다. ‘구봉산’이 맞는데 작명한 이가 하나를 미처 덜 챙겼다는 게 주민들의 추단. 천둥이라도 칠라치면 마을 어른들은, 봉우리 대접을 못 받은 무녀리 9봉이 울부짖는 소리라고들 했다.

이 면장은 “주민들이 9봉마냥 긴 잠에서 깨어나 이제 살아 보겄다고 소리를 내기 시작헌 것”이라고 말했다.

■ 가로림만 뻘바다도 '한 밑천'

팔봉산 3봉(주봉)에서 내려다보이는 서해 뻘바다가 그렇게 걸다는 가로림만이다. 팔봉면의 유일한 갯마을로 고파도 선착장이 있는 호리(虎里)가 그 한 귀퉁이를 비집고 앉았다.

횟집 숫자로 매겨지는 통상의 갯마을 관광지 등급 기준에 따르자면, 횟집이라기보다 식당이라고 해야 어울릴 듯한, 두 집이 전부인 호리마을은 결코 관광지는 아니다.

70~80년대까지만 해도 뻘밭 ‘뻥설게’나 꼬막 바지락 잡아다가 팔봉산 마을로 지게지고 다니며 보리나 콩을 바꿔 먹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고속도로가 나고 갯것이 제법 돈이 되면서 면에서는 부촌 소리를 듣지만, 인근 만리포나 안면도, 간월도 ‘관광지’에다 댈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호리 주민들도 최근 선착장 진입로 따라 산벚꽃 300주를 심었다.

바다모래 퍼가는 업자에게서 나오는 돈과 초상나면 상여 매고 받았던 사례를 여퉈 뒀던 마을 기금을 헌 것이다. 면에서도 500여 주를 심어 거들었다.

주민들은 멀리 오목개 4거리까지 심어 볼 참이라고 했고, 면에서는 바닷가에 해수탕이나 어촌 민박촌도 구상하고 있다. 요란한 관광지와도 다르고, 허름한 갯마을 땟국도 벗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봉산 관광객이라도 간월도에 빼앗기지 않겠다는 계산. 한 주민은“뚝배기보다 장맛이라고, 보기에는 이래도 사철 갯물이 없는 게 없고 맛도 그만”이라며 ‘관광포구’의 꿈을 내비쳤다.

/서산=글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