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와 린든 존슨, 로널드 레이건, 빌 클린턴 등 혁신적 정책 변화 를 가져 온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그때마다 한 권의 책을 그 근간으로 삼았다. 케네디와 존슨은 빈곤과 전쟁을 벌이고 대규모 사회복지 프로그램 을 도입하면서 마이클 해링턴의 ‘미국의 다른 모습’(The Other America )을 교범으로 삼았다. 레이건의 감세 정책은 조지 길더의 ‘부와 빈곤’(Wealth and Poverty)이 교과서가 됐고, 애초에 발칸 지역 개입을 꺼리던 클린턴은 로버트 케플란 의 ‘발칸의 유령’(Balkan Ghosts)을 읽고 정책 방향을 틀었다. 집권 2년 만에 두 차례의 전쟁을 결행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과연 무슨 책을 정책의 기본으로 삼고 있을까. 부시 행정부의 핵심 관료들은 어떤 책 을 읽고 이라크 공격을 결심했을까. 뉴욕타임스는 최근 ‘미국의 정책을 만든 책들’이란 기사에서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미 정부 고위 관료들의 탐독서를 소개했다. 부시가 탐독한 책 '최고 사령부'부시는 지난해 여름 휴가 때 미 국방정책위원회 위원이며 존스 홉킨스대 국제대학원 교수인 엘리어트 코언의 ‘최고 사령부_군인, 정치가 그리고 전시의 리더십’(Supreme Command_Soldiers, Statesmen, and Leadership in Wartime)을 즐겨 읽었다. 코언의 책은 그 뒤로 미 국방부와 국무부에서 회람되다시피 했다. 이 책의 요지는 ‘전쟁이란 군인에게만 맡겨두기엔 너무나 중요한 사건’ 이며 민간인 지도자가 부하 군인에게 간섭하고 지시해야 한다는 것. 책은 1991년 걸프 전에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군부의 말을 믿고 전쟁을 일찍 끝냈던 탓에 사담 후세인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데 실패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코언의 주장은 정치적 판단이 필요할 때 군인은 물장난 치는 아이들 처럼 너무 순진하다는 것이다. 딕 체니 부통령의 보수적 사고를 돕는 책 가운데 하나는 지난해 가을 그가 읽었다는 전사(戰史) 연구가 빅터 데이비스 핸슨의 ‘전쟁의 가을’(An A utumn of War)이다. ‘미국이 9ㆍ11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에서 배운 것’이 란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에서 핸슨은 고대 그리스인이 전쟁에 대해 내린 정의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전쟁은 처참하지만 문명화를 위해 필 수적이며, 악을 부수고 선을 구하는 대의명분을 위해 수행된다면 부당하거 나 비도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핸슨은 또 우리는 지금 ‘폭정과 무자비, 제정일치 사회를 쳐부수기 위한 유혈 전쟁의 와중에 있다’고 썼다. 그리고 그는 ‘적이 남지 않을 때까지 죄의식 없이 길고도 어려운 전쟁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체니는 측 근에게 핸슨의 책이 자신의 철학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좋아하는 책 2권은 윌리엄 맨체스터가 쓴 윈 스턴 처칠 전기 ‘마지막 사자’(The Last Lion)와 로베르타 홀스테터가 진주만 공격 과정에서 정보 체계의 실패를 분석한 ‘진주만_경고와 결정’ (Pearl Harbor_Warning and Decision)이다.
학자들이 보수 정책 대거 뒷받침
중요한 것은 이런 책들이 모두 미 행정부의 주류인 ‘신보수주의’를 유지ㆍ강화시키는 내용이라는 점이다. 음으로 양으로 이런 흐름을 부추기거나편승하는 보수파 학자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최근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낙원과 권력에 관하여’(Of Paradise and Power)를 쓴 로버트 케이건 카네기 국제평화기금 연구원이다.
그는 9ㆍ11 테러 직후 다른 보수주의자 40명과 함께 ‘후세인 정권이 9ㆍ11에 직접 관련 있다는 증거가 없더라도 테러리즘 제거를 목표로 하는 모든 전략은 후세인 제거 노력을 담아야 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부시 대통령에게 보냈다. 서한의 대표 작성자는 극우 주간지 ‘위클리 스탠더드’발행인인 빌 크리스톨이며 엘리어트 코언 교수도 서명했다.
미국의 보수주의 정책을 이끄는 눈에 띄는 조직 중 하나는 1997년 발주된‘새로운 미국의 세기 프로젝트’이다. 군사 태세를 강화하고 미국의 이익과 가치에 반하는 체제와 대결하도록 강조하는 이 프로젝트에는 체니, 럼스펠드,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루이스 리비 부통령 비서실장 등 미행정부 핵심 관료는 물론 케이건의 아버지이자 예일대 교수인 도널드 케이건, 코언, 프랜시스 후쿠야마 등 학자들이 다수 들어 있다.
보수주의 학자들은 미국 신보수주의 운동의 창시자인 레오 스트라우스(작고ㆍ정치 철학) 전 시카고대 교수의 추종자들이다. ‘스트라우스주의자’(Straussians)로 불리는 이들은 외국인과 토박이를 적으로 몰고, 그들에대항해 자유민주주의와 도덕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권리를 의미하는 ‘자연권(Natural Right)’이란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신보수주의 전통은 베스트셀러 ‘미국 정신의 종막’(The Closing of theAmerican Mind)을 썼고 후쿠야마와 월포위츠를 가르친 앨런 블룸(작고ㆍ정치 철학) 시카고대 교수가 대중화했다. 스트라우스와 블룸은 모두 도덕적상대주의를 강하게 비판했으며 고전 교육과 엘리트 교육을 중시했다. 이라크 전쟁을 마무리하고 부시 행정부가 또 다른 결단을 내릴 때 이런 보수주의 학자들의 조언이 어김 없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김범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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