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리그 해리슨 지음·이홍동 등 옮김 삼인 발행·1만9,800원북한 핵 문제와 한미 동맹 관계를 놓고 미국 보수 논객들의 무책임한 주장이 '레드 라인'을 넘고 있는 가운데 시각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책이 하나 나왔다. 미국의 원로 언론인이자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셀리그 해리슨의 '코리안 엔드게임'(Korean Endgame)은 북한에 대한 무력 사용 불사와 주한 미군 철수 주장 등 감정적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보수 논객들의 입장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미국의 탈 개입(Disengagement)과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전략' 이라는 부제의 이 책은 미국이 통일의 당위성을 인정하고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통일은 결국 남한 주도로 이뤄질 것이라는 데 동의하면서 그 과정에서는 연방 또는 국가연합 형태가 가장 합리적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또 미국의 탈 개입은 한반도 안정과 남한의 안보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평화적이고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상정한 통일 한반도는 비핵·중립화한 한국이다. 그는 자신의 한반도 문제 해법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지적을 십분 의식한 듯 미국의 탈 개입과 한반도 통일이 안보 불안을 야기하지 않고도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선 미국은 북한과 대화하고 관계를 정상화한 뒤 북한을 안보 위협에서 해방할 수 있는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촉구한다. 또 이와 병행해 남북한은 군비 감축 협상을 본격화하고 주한 미군은 그에 맞춰 철수하면 된다고 제시한다. 미국의 탈 개입이 완성되면 한반도는 비핵·중립화를 이룰 수 있고, 주변 4강인 미·일·중·러가 이를 보장하는 이중의 장치를 갖추면 한반도 문제는 최종적으로 해결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비핵·중립화한 통일 한국은 미국의 이해에 부합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북한이 핵 카드를 가지고 벼랑 끝 전술을 쓰고 있고, 주한 미군이 인계철선 역할을 하며 전쟁 억지력으로 존재하는 현실에서 저자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질 지는 의문이다. 또 세계 유일의 초대강국인 미국이 진정으로 한반도 중립화에 동의할지도 짚어야 할 대목이다. 당장 부시 정부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고, 김정일을 대화 상대로 보지 않고 있다.
저자는 실현 가능성과는 별도로 미국은 북한과 진지하게 협상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강조한다. 그는 부시 정부의 대북 강경책을 강하게 비판한다. 대북 강경책은 북한이 장거리 핵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전향적 협상을 하면 적은 비용으로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고 충고한다.
저자는 1994년 네 번째로 평양 방문에서 김일성 주석을 세 시간 동안 면담, 북한이 핵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이 외교·경제 제재를 해제하는 절충안을 제시해 위기 상황을 돌파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제네바 북미 협상 때는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저자의 주장은 남북한과 미국을 등거리에서 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일각에서 그는 친북 성향이 농후하다고 지적하지만 미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 가운데 이런 인물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다. 그는 한국 독자들에게 보낸 서문에서 자신은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역할에 깊은 유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병규 논설위원 veroic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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