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환 지음 현대문학 발행·1만2,000원
정명환(74·사진) 전 서울대 불문과 교수는 일본어를 통하지 않고 직접 프랑스어를 통해 불문학을 수용한 1세대 학자다.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의 번역을 통해 실존주의틀 우리 비평에 본격적으로 접목한 문학평론가이기도 하다.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사상계' '세대' '동서춘추' '철학과현실' 등에 게재된 시평(時評)과 문학적 단상, 철학적 수상 40여 편을 엮은 그의 산문집 '이성의 언어를 위하여'는 한국 현대 지성사의 한 장이다.
산문집 제목처럼 그는 언어에서 엄정한 이성을 추출하는 데 힘을 기울인다. '오리무중'을 한자로 쓰라는 문제에 한 수험생은 '汚吏無中'이라고 써놓았다. 처음에는 탄식했던 것이 경탄으로 바뀌었다. 이걸 해석하면 '무슨 이권이 없나 하고 쉴새 없이 두리번거리는 썩은 관리(汚吏)들에게는 중용(中庸)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한 수험생의 엉뚱한 창조적 오류를 통해 정씨는 한국 사회의 부패와 고질을 질타한다. '원칙적으로'라는 말이 자주 쓰이는 것을 보고, 원칙이 서기 어렵고 예외가 도리어 판치는 사회를 꿰뚫어본다. '내국인 출입금지'라는 말에서 한국인이 동포에 가하는 위협과 불신과 자학적인 모욕을 통찰한다.
그는 "내가 한 젊은 지식인으로서 느꼈던 1960년대의 에토스가 오늘날에는 말끔히 가셨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지 의심이 간다"고 적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그의 글 속에 세워진 에토스의 날은 여전히 서늘하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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