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후 전직(前職) 지점장 10여명이 모여든 서울 서초동 국민은행(KB)전직(轉職)지원센터. 이곳은 KB가 지난해말 470명을 명예퇴직시키면서 자사 퇴직자들의 재취업, 창업 준비를 돕기 위해 1월부터 운영하기 시작했다.정년을 3년 남겨두고 명예퇴직했다는 김기재(55)씨는 부동산창업강의가 끝난 뒤 "어떻게 점포를 싸게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며 이승용 수석컨설턴트를 붙잡았다. 김씨가 "잠실에 있는 부동산중개업소에서 현장실습을 하기로 했다"고 하자 이씨는 "한달이라도 현장 경험을 한 뒤 점포를 구하는 등 창업에 나서면 실패 확률이 적다"고 충고했다.
김씨는 "퇴직 전 8개월씩이나 대기발령 상태였는데 일자리 궁리를 하지 못한 채 지나가버렸다"고 털어놓았다. 도시락배달전문점부터 대형사우나 구두닦이까지 이런저런 고민도 했다. 하지만 교육프로그램과 상담 등 3개월간 전직지원컨설팅을 받으면서 18년 전 따놓은 공인중개사자격증을 활용해 부동산중개업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기업의 전직지원 프로그램이 늘고 있다. 전직지원은 기업이 퇴직을 앞두거나 퇴직한 직원들에게 재취업이나 창업 등 일자리를 찾는데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직원들을 위한 애프터서비스인 셈이다. 대우자동차, 포스코, 교보생명 등에 이어서 최근에는 한국전력, KT, KB, 육군 등도 전직지원프로그램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인력파견업체 사장으로 변신한 박형배(51)씨는 "전직지원프로그램이 새 출발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교보생명에서 퇴직한 박씨는 주로 인사관리 업무를 해온 경력을 살린 경우. 음식배달, 택배 등 흔하디 흔한 창업 아이템을 놓고 고민하던 그에게 컨설턴트가 경력을 보고 인력파견업을 권유했다. 박씨는 퇴직 직후 회사에 서운한 마음도 들고 갑자기 할 일도 사라져 '정신적 공황'에 시달렸다. 그는 "IMF이후 많은 동료들이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제대로 일자리를 찾은 경우는 드물다"며 "체계적인 전직지원프로그램이 있으니까 새 출발이 더 쉬운 것 같다"고 말했다.
KT에서 31년간 기술분야에서 근무하고 올해 2월 명예퇴직한 이세형(57)씨도 전직지원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원룸임대사업을 시작했다. 임대사업을 하려해도 막상 계약이나 대출 등 구체적으로 절차를 밟으려니 막막해졌다. "원래 정년퇴직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회사가 인력을 대거 감축하면서 갑자기 그만두게 돼 전혀 대책이 서있지 않았다"는 이씨는 "앞으로 무엇을 할지 자문이 필요했는데 이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심지어 퇴직 후 건강보험, 국민연금과 같은 4대 보험 적용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전직지원프로그램을 통해서 알게 됐다고 한다.
회사로부터 전직지원을 받은 이들은 "새로운 일자리에서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평생직장으로 생각해온 회사에 대한 배신감도 상당히 누그러졌다"고 말했다. 전직지원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기업들이 늘어가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전직지원컨설팅업체 DBM코리아 김은주 마케팅팀장은 "전직지원프로그램은 퇴직 직원의 불만에 따른 기업의 이미지 훼손을 막고 남아있는 직원들의 불안심리도 덜어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아직은 기업들이 구조조정으로 대규모 인력 감축이 필요할 때 '퇴직패키지'로 전직지원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상시적으로 전직지원센터를 운영하면서 지원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곳은 한국경영자총협회, 삼성생명 등 손에 꼽을 정도. 때문에 국내 경기의 흐름을 간접적으로 판단하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민영화로 가는 공기업과 고전을 면치 못하는 금융권에서 전직지원프로그램을 도입하는 추세다.
정부도 2001년 7월부터 정리해고 등 경영상의 불가피한 이유로 퇴직한 사람들을 위한 전직지원에 대해 장려금을 지원하고 있다.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21개 업체가 총4억3,200만원을 지원받는데 그치고 있다. 김은주 팀장은 "전직지원제도가 활성화하면 고령자 재취업문제가 상당히 해소될 것"이라며 "비자발적 퇴직자를 위한 전직지원의 경우에도 요건을 완화, 적극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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