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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 24년 철권통치 마감… 운명 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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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 24년 철권통치 마감… 운명 위태

입력
2003.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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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이라크 바그다드가 함락되면서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막바지에 몰렸다. 24년간 철권통치 체제를 구축해 온 그의 운명은 바람앞에 등불처럼 위태롭다.유복자에서 대통령까지

그는 1937년 4월28일 바그다드 북쪽 티크리트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사촌오빠와 재혼해 그는 계부의 학대 속에서 자랐다. 9세 때 가출해 외삼촌 밑에서 생활했으며, 바그다드의 고등학교와 이집트 카이로 법대에서 공부했다.

그는 56년 친영 왕정체제를 전복하려는 폭동에 가담한 뒤 현 집권당인 바트당의 민병대원이 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60년에는 쿠데타로 왕정을 무너뜨린 군 출신 총리를 암살하려 한 혐의로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기도 했다. 68년 바트당이 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이후 혁명평의회 부의장, 당 사무총장, 혁명평의회 의장, 대통령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이슬람의 민족주의 지도자

그의 통치철학은 서방의 지배에 대항하는 이슬람의 대의명분과 깊숙이 맞물려 있다. 91년 걸프전 당시 아랍권 국민들은 그를 아랍민족주의의 영웅으로 추앙했다. 공포정치와 경제제재로 어려움에 빠졌던 이라크 국민들 조차도 그를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지도자로 여겼다.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반군과의 종교갈등, 북부 쿠르드족과의 민족갈등 등 국가 정체성의 위기도 그의 지도력을 강화한 요인이었다.

무자비한 정적 탄압

그가 24년간 권좌를 지켜온 비결은 2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그는 적자생존의 법칙을 체득했으며, 대중심리조작에 능했다는 점이다. 소수의 충성파를 동원해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공포정치나 서방의 경제제재를 역이용한 교묘한 여론정치는 모두 이런 원칙에서 이뤄져 왔다. 측근이라도 의심되면 가차없이 권력핵심에서 배제한 그의 권력게임은 무자비하기까지 했다.

미국이 만든 후세인

후세인의 부상에는 미국의 역할이 컸다. 미국은 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이 전 중동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후세인 정권을 적극 지원했다. 물론 배경에는 세계 석유기지였던 중동을 지켜야 한다는 경제적 이권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미국은 후세인을 이란 견제카드로 활용하기 위해 이집트의 개혁개방을 이끌었던 안와르 사다트 전 대통령의 반열에까지 추켜세웠다.

하지만 후세인이 미국에 저항하는 이슬람권의 맹주로 자리매김되며서 그는 미국의 전략적 제거대상이 되고 말았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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