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어린이 만화 전성기에 만화방을 들락거렸던 지금의 중·장년층에게는 고 김경언(金庚彦·1929∼1996) 선생의 '의사 까불이'가 기억의 한 귀퉁이에 또렷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재건과 반공의 기치를 내걸고, 이 땅의 모든 어른들에게 '한 손에 망치, 다른 한 손에는 총'을 들게 했다. 이런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어린이란 존재는 천덕꾸러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때마침 도시의 골목 어귀마다 문을 연 만화방들은, 방과 후 갈 곳이 없었던 우리 어린이들에게 '꿈의 공장'역할을 했다.
64년에 발표된 '의사 까불이'는 당대 어린이 명랑 만화의 실질적 선구자였다. 이전에도 이 분야의 만화는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웃기는 내용을 담았지만 성인의 눈높이에서 창작된 근엄한 분위기의 그림 일색이었다. 만화 매체가 가진 이미지 전달 측면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던 것이다. '의사 까불이'는 캐릭터의 움직임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만화체인 데다, 주인공은 물론 등장 캐릭터들이 그림 칸 속에서 쉴 새 없이 넘어지고 뒹구는 등 슬랩스틱(slap-stick)류 연출을 시도했다. 당시 어린이들이 온 몸으로 만화 보는 재미를 공감했던 이유다.
의사 까불이는 뚱뚱하고 급한 성격의 마음씨 착한 간호사와 함께 눈부신 활약을 한다. 키 작은 어린이들을 위해 단숨에 키 크는 약을 개발하는가 하면, 홀쭉하게 혹은 뚱뚱하게 변신시키는 묘약도 개발해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 준다.
그런가 하면 무고한 시민을 괴롭히는 강도를 잡는 등 우리 사회의 병든 곳을 고치는 당대의 명의로 어린이들에게는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김경언 선생은 서울대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55년 경향신문의 4컷 시사만화 '두꺼비'연재를 시작하면서 만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조선일보와 연합신문, 서울신문 등에 '꾀동이' '고구마' '깔끔이' '어수선' '사공선생' 등을 게재했다. 선생은 타고난 만화가로 잉크와 펜 그리고 그림 그릴 밑 종이를 항상 갖고 다닌 일화가 유명하다. 앉은 자리에서 대여섯 페이지의 만화는 쓱싹쓱싹 그려내는 놀라운 실력이었다.
50년대 말, 만화방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김 선생은 전업 단행본 만화작가의 길로 나섰다. '우락돌이 부락돌이'(59년)를 위시해 '먹보' '왕' '박김이 삼국지' '용가리'(이 만화는 '꽈가리' '쌍가리'등 기발한 제목의 후속 편이 나왔다) 등 60년대를 통 털어 약 500 종의 단행본을 창작했다. 하루 이틀 만에 100쪽 짜리 만화책 한 권을 그려내 출판사를 놀라게 했던 적도 있었다. 60년대 최고의 인기 만화작가로 군림했던 그는 70년 미국 이민을 떠나면서 화려했던 만화인생을 매듭했다.
선생은 만년에 지병인 중풍으로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한국의 명문 서울대 출신의 만화가'라는 강한 프라이드를 잃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96년 6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손상익·한국만화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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