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무대에서 일할 당시 나는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에 한 번씩 오디션을 봐야 했다. 얼추 40차례 가까이 그 시험을 치렀다. 내 음악과 음악성이 거의 전부 그 시절에 확립됐다고 해도 좋다.미군 무대는 또 나에게 바깥, 즉 국내의 일반 무대로 나가기 위한 교두보이기도 했다. 미 8군 활동 중 에드훠를 만들어 우리말로 노래를 부르니, 다음 차례는 일반 무대였던 것. 서울 시민회관 공연이 첫번째 수순이었다. 미군 무대에서의 명성을 듣고 시민 회관쪽에서 연락을 해 왔다. 나는 그 무렵부터 에드훠의 대표 자격으로 공연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시민 회관 사무실에 자주 가게 됐다.
당시 시중의 일반 무대로는 을지로 국도극장을 본부로 해, 대한, 명보, 대한, 중앙, 스카라 극장 등이 터를 잡고 있었다. 대개 쇼단 너댓개는 항상 무대에 올라 있었다고 보면 된다. 빅쇼를 할 경우는 서울을 벗어나 지방의 큰 무대까지 진출했다.
그밖의 공연장이라면 종로 국일관, 충무로 서울 클럽 등 카바레들이 있었다. 당시 이름으로는 땐스홀. 생활에 여유가 생겼던 우리는 명동 일대의 음악감상실이나 큰 식당 등지에서 요청을 하면 무대에 서기도 했다.
각 단체의 우두머리들은 문공부에서 발급한 단장증을 갖고 있었으나, 실은 모두 야쿠자(조직폭력배) 두목이었다. 주먹 세계에서 나름대로 오야봉의 신임을 받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김두한의 통일 천하가 와해되고 난 뒤에 주먹의 춘추전국 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나는 극장 대관 문제로 자연히 그들과 접촉이 잦았다.
내가 단원들을 이끌고 쇼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두목들이 당시 어린 나이였던 나를 귀여워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업소에서 내 출연료를 약속대로 주지 않을 경우, 휘하의 주먹들을 시켜 업주에게 압력을 넣는 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충무로 신상사파나 명동 메기파 등 당대 어깨의 두목들과 안면을 트고 지냈다. 그들이 휘하의 사람을 보내면 골치 아픈 일들이 풀리는 게 보통이었다. 그들은 또 내 보디 가드 역할도 했다. 어느 지역에서 콘서트를 하면 그곳 주먹들은 싸움 등 골치 아픈 일이 터지지 않도록 손을 다 써 놓고 있었다. 장자는 '진정한 용맹은 양인(良人)을 해치지 않는 법'이라 했는데, 그들이 꼭 그랬다고나 할까.
조직폭력배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로 접어 들면서부터라고 알고 있다. 전남, 경남 등 지방에서 주먹들이 상경하면서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 세력을 잡고 있던 원래의 주먹들을 밀어낸 것. 자연히 유흥업소의 기도(木戶·총무) 등 관리 인력 또한 그 지역 사람으로 대체되면서 회칼 난자 사건 등으로 풍토가 완전히 바뀌었다.
미군 부대내 클럽들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60년대 말 미군 감축이 시작되면서부터 였다. 사람이 줄면서 클럽은 줄어들고 상대적으로 기지촌이 번창하게 됐다. 이태원 동두천 파주 송탄 등지에 번창한 기지촌이란 사실 우리의 뒤안길이 담겨져 있는 곳이다. 특히 국내 최대의 미군 공군 기지였던 송탄 K-55 부대의 기지촌은 음악인들이 만든 것으로, 특히 나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곳이다.
1974년 대마초 사건으로 철퇴를 맞아 일체의 활동을 할 수 없었던 내가 근근이 버텨나갈 수 있었던 근거가 바로 그 곳이었다. 처음에는 그 부대내의 하우스 밴드(전속 악단)로 조금만 일하다 떠나려 했으나 어쩌다 보니 넉달을 거기서 보냈다. 나중에 송탄 관광 호텔 등지에서 연주하게 된 것이 바로 그 시절 맺은 인연 덕택이었다.
미군 무대와의 인연은 내가 오디션에 응하지 않게 되니 자연히 끊겼다. 미 8군 무대는 '비속의 여인', '봄비', '님아', '늦기 전에' 등 일련의 작품들을 남겨둔 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구체적으로는 1968년 펄 시스터즈의 '님아'가 빅히트를 기록하면서, 더 이상 미군 무대에 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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