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좀더 고상하고 영속적인 것에 문화라는 이름을 붙인다. 텍스타일 디자이너는 매년 유행할 옷감을 디자인하는 직업이다. 그들이 만드는 옷감의 무늬는 한 철을 버틸 뿐이다. 약하디 약한 진달래 꽃잎도 이듬해면 어김없이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텍스타일 디자인은 한때 잠시 나타났다 스러져가는 무늬를 잡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문화라기보다는 산업으로 불린다. 그런데 우리가 이탈리아를 문화국으로 부르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유적 때문만은 아니다. 시골 구석 작은 레스토랑의 화장실 타일조차 섬세한 미감으로 빛날 때 우리는 그 나라의 문화성에 승복할 수 밖에 없다. 미켈란젤로도 알고보면 수십명의 장인을 진두지휘한 건축·회화·조각산업자였고, 모차르트는 당대의 비틀스였다. 어느 예술가인들 현대에 태어났으면 이처럼 생활 곳곳으로 스며드는 일상용품을 디자인하지 않았으랴. 그래서 텍스타일 디자이너 이경희(39)씨를 만났다.이씨는 한국텍스타일디자인연구소를 만들어 국내 텍스타일 디자인의 발전을 모색했던 이 분야의 전문가. 전남대 미대와 일본 무사시노대 대학원을 나온 그는 일본의 대중브랜드 '쥰'에서 근무하고 국내서 조선대, 홍익대와 숭의여대에서 강의를 하는 등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텍스타일디자이너로 꼽힌다. 한때 연구소를 통해 우리보다 앞선 일본의 전문가들을 초빙해 국내 강좌도 열었던 이씨는 요즘은 연구소를 디자인 제작소로만 운용하고 있다. 재택근무를 하는 연구원 25명 가운데 17명이 일본인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눈에 보이는 이익이 없으면 금방 직종을 바꾸더군요. 일본인들은 손해가 나도 한 가지 직종에 종사하면 꾸준히 하려고 하기 때문에 전문가로 크기가 쉬워요"라고 말한다.
이씨는 요즘 2절지 크기의 포트폴리오를 들고 의류업체를 다니며 올 여름과 가을·겨울을 위한 텍스타일 디자인을 팔고 있다. 4월 한 달이 제철이기 때문이다.
그는 "섬유업계에는 IMF가 이제 왔다고 한다"며 업계의 어려운 상황을 전한다. "전에는 1,000야드(914m 정도)는 되어야 찍었지만 요즘은 200야드(183m 정도)만 되어도 찍어준다"니 그만큼 소량생산체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독특한 디자인으로 소량생산하는, 고부가섬유산업의 시대에 접어들어 텍스타일 디자인은 전성기가 왔다는 것인가.
"아니다. 제작 물량이 줄어든 것 뿐이다. 한국에서는 돈을 주고 디자인을 산다는 개념 자체가 아직 정착되어있지 않다. 가뜩이나 이런데 불황까지 닥쳤으니 텍스타일 디자인이 더욱 위축될까 걱정스럽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섬유업체가 매년 생산하는 원단은 73억 제곱 km.(2001년 통계청 광공업통계 조사보고서) 그러나 이 가운데 국내서 창작한 디자인으로 제작된 원단은 10%를 넘지 못한다. 실은 이보다 훨씬 적다. 국내 원단 제작업체인 삼미물산의 이숙진(32) 디자인실장은 창작 텍스타일 디자인으로 만드는 원단이 5% 정도라고 한다. 나머지는? 대답이 없다.
업계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체로 외국의 원단을 내수용으로 계약해서 내보내는 경우도 있지만 계약 없이 외국의 인기 제품을 카피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고 한다. 프라다의 대나무 무늬가 뜰 때 직물시장마다 쏟아져나온 유사제품을 생각해보면 알만한 일이다.
국내 업체들간의 베끼기도 일상화해있다. "텍스타일 디자인 자체를 저작권 등록하는 경우가 드무니까 업체들간의 분쟁이 일어나도 명확한 책임소재가 가려지지 않는다"고 이씨는 안타까워한다. 이런 상황에서 후배들을 창작자로 길러내는 것 자체에 회의를 느낄 때도 많다.
이씨는 전남대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하며 섬유에 끌렸다고 한다. 곧바로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일본어를 공부했다. 1986년 대학을 졸업하고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텍스타일연구소에서 일도 하고 공부도 배웠다. 89년에 무사시노 대학원에 들어가 2년동안 텍스타일 디자인을 전공했다.
가서 놀란 것은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대신 스스로 깨닫게 한다는 사실. "이미 대학원에 들어갈 때는 자기만의 예술세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하더군요. 네가 연구하려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세상에 어떤 섬유제품을 내놓고 싶으냐를 묻고 그것이 가치있으면 학생을 선발하더군요." 그리고 그 학생이 선택한 것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대학원이었다고 한다. 그가 선택한 것은 비치는 양모였다. 당시만 해도 양모는 두껍게만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는 실크소재 시폰처럼 양모에서도 하늘거리는 천을 만들고 싶었다. 졸업작품으로 펠팅기법을 활용해 하늘거리는 양모 숄을 만들었다. 몇 년전부터 하늘거리는 양모가 유행하는 것을 보면 그의 감각은 상당히 앞서간 셈이다.
그러나 이즈음 그의 텍스타일 디자인을 보고 있으면 그다지 앞서가는 것 같지 않다. 세련됐다고는 하지만 세계시장을 주도할만한 참신함은 느끼기 힘들다.
"대량생산을 위해 제작되는 텍스타일 디자인은 세계의 유행경향을 우리 실정에 맞게 풀이하는 작업 정도이니까 그렇게 첨단의 유행 주도 디자인이 나오기 힘들다"고 말한다. 대신 그는 별도의 작품전을 통해 자기만의 개성이 담긴 작품을 발표하려고 애쓴다. 88년 이래 거의 매년 일본과 한국에서 작품전을 가져왔다.
"사실 텍스타일 디자인은 올해 디자인을 내놓고 나면 빨리 잊어버리고 다음 시즌을 준비해야 하거든요. 그런 점에서는 그야말로 상품 생산일 뿐이지요." 그의 실력도 그가 만든 디자인이 얼마나 팔렸느냐로 평가된다. 그가 지금까지 만든 제품 중에 가장 인기있었던 것은 작년에 베네통의 여름 옷으로 제작된 린넨천에 올린 오렌지 꽃 무늬. 화려한 여름 꽃을 시원스런 크기로 영색한 이 천은 7,000야드(6.4km정도)나 팔렸다.
그는 텍스타일 디자인을 하면 우선 국내 의류업체 디자인실을 상대로 제품을 판매한다. 그러면 업체서는 디자인을 선택한 후 국내 제작업체에 제작을 의뢰한다. 이 때 색이 정확히 앉혔는지를 봐주는 역할도 텍스타일 디자이너가 해야 한다. 오래 이 과정을 지켜본 그는 제작공장의 배색사가 전문화하지 않은 것이 우리나라 섬유업의 발전을 더디게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똑 같은 색이라도 붉은 색과 푸른 색, 노란 색의 배합이 미묘하게 달라지면서 색감도 달라지는데 이 같은 것을 오랜 경험으로 판별할 배색사를 키워내지 못했다는 것. 선진국의 섬유에 비해 우리나라 섬유가 어딘지 세련된 맛이 적은 것도 바로 이 미묘한 색감을 잘 맞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소재는 세계가 함께 공유할 수 있지만 디자인과 색채만은 그 나라의 제작실정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난다"며 "이런 점에서 현장의 전문가를 키워낼 수 있는 바탕이 되지 않은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고 말한다. 원단 제작 자체가 의류업체의 하청으로 이뤄지다 보니 자체 수익을 내는 것이 힘들고, 결국에는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로 간다는 것이다. 국내 것이든 외국 것이든 텍스타일 디자인을 사들이지 않고 유명 제품을 베끼려는 것도 다 이 같은 풍토에서 나오는 것. 무엇보다 다른 나라의 디자인을 베끼면 도둑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정신 자체가 섬유 업종의 진정한 발전을 막고 있다고 그는 보고 있다.
그의 디자인은 국내서만 소모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일본 대만에도 팔려나간다. 그는 "우리보다 훨씬 앞서간 미국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대만만 해도 당연히 텍스타일 디자인은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사는 창작품이란 인식이 분명하다"고 일러준다.
한 때 그는 연구소를 통해 섬유 선진국 일본의 전문가를 초빙해 강연을 많이 했다. 그 때마다 사람들이 기본은 배우려고 하지 않고 기법만 묻는 통에 놀랐다는 그는 "일본에서는 아마추어 염색애호가들도 염색을 하려면 정확히 물 얼마에 염료 얼마를 넣어야 하는지를 숙지하고 있다. 그래야 염료는 천에 베고 염색 후 맑은 물만 남는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전문가들도 대충이 많다. 이래서는 전문가를 키워낼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 같은 후진 양성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그는 "모든 문화는 혼자만의 창의성을 그 사회가 얼마나 존중해주느냐에 따라 발전 여부가 달려있다"며 "아마도 텍스타일 디자인을 발전시키는 지름길은 경영자들의 도덕성 훈련을 시키는 것일 것"이라며 웃었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 그가 꼽는 디자이너
루비나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옷의 형태에 주목하는 반면 루비나씨는 소재 개발에도 열심이다. 손맛나게 염색한 그의 옷을 보노라면 디자이너의 옷이 어떤건가를 새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매 시즌 새로운 옷을 선보일 때마다 직접 원단을 만지는 디자이너가 느껴져서 좋다.
강진영
'오브제'와 '오즈세컨'으로 유명한 이 디자이너와는 96년부터 함께 일했다. 매년 12∼18개의 텍스타일 디자인을 제공해왔다. 강진영씨는 텍스타일 디자인을 구매하면 반드시 저작권 등록을 한다. 이 때문에 국내 업체가 디자인을 무단으로 베끼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 창작품에 대한 이런 명확한 인식이 일하는데 도움이 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