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은 119와 같다. 아니, 자기 일을 가지고 있고 결혼한 한국 여자들은 거의 다 119 소방대원 같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의 딸이며 딸의 어머니인 두 사람, 화가 윤석남(64)씨와 시인 김승희(51)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때 두 사람의 목소리는 분노로 날서 있지도 않고 피곤에 젖어 있지도 않다. 그 목소리는 따뜻한 사랑으로 충만하다. 김씨가 글을 쓰고 윤씨가 그림을 그린 책 '김승희·윤석남의 여성 이야기'(마음산책 발행)도, 7일 오후 두 사람이 만나 나눈 대화도 그렇게 풍요로운 사랑 이야기였다.김승희 10년쯤 전이던가, 비행기 안에서 엄마와 무섭게 싸웠죠. 엄마가 부치는 가방에 술병을 넣었기 때문이에요. 아들에게 준다고, 술에 빠져 사는 아들에게 술을 사다 준다는 엄마가 미워서 화를 냈지요. 무절제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애정을 투입하고, 자식의 공기까지도 흡착하려고 하고. 비행기에서 다른 좌석으로 바꿔서 떨어져 앉은 뒤에야 평온해졌지요. 사랑하기 위해선 그렇게 거리가 필수적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윤석남 나는 마흔이 되어서야 미술을 시작했는데, 그때 딸아이는 네 살이었어요. 아이에게 전적으로 애정을 줄 수 없었지요. 아이는 미술이 엄마를 빼앗아갔다면서 미술이라면 진저리를 쳤어요. 아이 때문에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친구가 그러더군요. 엄마가 하는 일이 좋은 일이라면 언젠가 아이가 이해할 거라고. 이제 서른 다 된 내 딸이 그래요. 일하는 엄마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아마 그 사랑하기 위한 거리가 유지됐기 때문이 아닌지.
김 할 수 있는 사랑만 해도 아무도 낙오자로 부르지 않을 거예요. 미국에 거주할 때 한국에서 입양한 아이에게 젓가락 쓰는 법을 가르치려는 미국인 부모를 만났어요. 이런 얘길 하더군요. "젓가락은 두 개로 이루어져 있지?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두 개의 젓가락이 평형을 이루어야 한다." 사랑이라는 젓가락 한 쪽만 갖고는 행복이라는 양식을 집을 수 없지요. 어머니와 딸, 두 여성 사이에도 사랑과 함께 평형을 이룰 만한 무엇이 있어야겠지요.
윤 이상한 일이에요. 내 작품에는 남성이 나오지 않아요. 드로잉을 하든 나무에 새기든(윤석남씨는 버려진 나무와 빨래판 등에 여성의 모습을 그려넣는 설치 작업을 하는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여성의 아름다움과 고통, 여성의 힘을 그려넣지요. 남성을 그리려는 시도도 했는데 안되더군요. 내 그림의 근원은 결국 여성성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 내 시가 출발되는 지점이기도 하지요. 한때는 여성이라는 게 싫었어요. 고통과 열등의 뿌리, 분노와 저항의 대상이었지요. '엄마와 딸-그 얽힌 넝쿨들'이라는 미국 현대 여성시 앤솔로지를 읽다가 세상의 모든 여성들이, 여성 시인들이 거의 비슷한 원형질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연민, 혐오, 족쇄, 그리움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 사랑과 분노와 허무라는 삶의 원형질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윤 그 어머니들이 자식을 키웠지요. 어머니라는 이름은 희생과 동의어처럼 여겨지지 않았던가요. 사실은 넓은 바다 같은 사랑의 다른 말이지요. 모든 자식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입고, 또 그 사랑 안에서 살아온 것이지요. 여성의 힘은 그런 다사로운 사랑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요.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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