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4,000년경부터 시작되었고, 그때 비로소 토기와 골각기에 회화적 문양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 시대인들은 왜 사물의 구체적 형태를 그리지 않고 현대인이 '추상적·상징적 문양에 불과하다'는 즐문, 점열문, 격자문 등 기하학적 문양만 그렸을까?아마 그들은 인간을 비롯한 동식물 등 생명을 가진 존재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고 이들을 모사, 사생하는 행위는 이들의 영혼을 덜어내거나 훔쳐내는 위험한 짓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생에 대한 외경심과 소멸에 대한 공포가 생명체에 대한 모사를 위험한 행위로 인식토록 했을 수 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입면체에 대한 선사시대인들의 고정관념에 있다. 이들로서는 아직 입면체를 평면에 표현한다는 기교를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형상과 질량을 가진 물체를 선으로 해석한다는 회화적 감각을 미처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토기나 골각기와 같은 입면체의 용구를 만들고 그 표면에 추상적이며 상징적인 문양을 그리면서도, 입체적인 물체의 형상을 그곳에 그린다는 생각에는 이르지 못했다. 입체적인 대상을 흙으로 '만들어' 표현할지언정 흙에 '그려' 표현한다는 경지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무리였을 것이다.
이런 선사시대인에게도 신석기 말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종교적 필요에 의해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었다. 그들은 '영혼을 불러온다'는 의미에서 제례행위의 대상인 인간과 동식물의 형상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경건하게 그리기 시작했고 이때 비로소 입면체를 평면에 선으로 표현한다는 사고의 전환이 이뤄졌다. 실로 한국 회화사 최대의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심상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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