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지기 쉬운 유리컵처럼 민감한 금융시장은 경기침체의 충격을 가장 빠르게,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작년 말부터 불안한 조짐을 보여온 금융시장은 북한 핵 문제, SK글로벌 분식회계 사태, 신용카드사 부실화 등 악재들이 겹치면서 사실상 마비상태에 빠져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정부는 잇따라 시장안정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시장 기류를 돌려놓을 만한 근본적인 처방은 되지 않고 있다. 이번 주 들어서는 이라크 전쟁 조기종결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서 금융시장이 반짝 호전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이는 단기간의 현상일 뿐 시장불안이 근본적으로 해소되기까지는 상당기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게 시장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중소기업 자금담당 팀장과 시중은행 외화차입 담당자, 신용카드사의 연체채권 회수 팀장으로부터 그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금융 불안의 실체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 주은행 외자도입담당 K부장
"은행 외화차입에 숨통이 트였다고요? 천만에요. 물론 단기 차입엔 문제가 없지만, 1년 이상 장기차입은 꽉 막혀 있어 잠재적인 위험은 더 커지고 있습니다. 이 상태가 몇 달 계속되면 하반기 가서 은행들은 손발 다 들 수밖에 없습니다."
A은행에서 외자 조달을 담당하는 자금팀 K부장은 3월 중순 외화차입 시장이 숨 넘어갈 정도로 다급했다면 지금은 겉으론 진정됐지만 단기차입 비중이 높아져 속으론 더 심각한 구조적인 위험에 처했다고 말했다.
K부장은 "장기차입의 경우 신용으로 빌리는 것은 불가능해 국공채 등을 담보로 달러를 빌리는 '담보부차입(레뽀·Repo)'만 간신히 이뤄진다"고 말했다. 담보 없이는 장기차입은 꿈도 꿀 수 없다는 얘기다. 그는 또 "3월 이전엔 신용차입(신디케이트론) 금리가 3년짜리 기준 리보+0.4∼0.5%포인트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레뽀 거래를 해도 1년짜리 금리가 리보+0.35∼0.40%포인트나 된다"고 말했다.
3월 중순 은행들의 외자차입이 꽉 막혔던 원인은 SK글로벌 사태, 북핵 문제 등으로 정상적인 해외 차입이 끊기면서 은행들이 가산금리가 더 높은 원·달러 외환스왑시장에서 달러를 마구 끌어다 썼기 때문이다. 1년 차입시의 스왑포인트(원·달러 금리차를 감안한 선물환 마진)는 한때 18원까지 내려갔다가 현재 28원 수준으로 회복됐지만 아직까지 정상가격(35∼37원)을 훨씬 밑돌고 있다. 스왑포인트가 내려가면 그만큼 가산금리는 치솟는 것이기 때문에 스왑시장을 통해 달러를 빌려주면 외국은행은 정상적인 거래보다 두배 가까운 금리마진을 챙길 수 있다. 국내 은행들은 그만큼 비싸게 달러를 빌리는 셈이다.
K부장은 "스왑시장이 망가지면 은행들의 달러조달 수단은 아예 없어지는 것"이라며 "한국은행이 외환보유고를 사용해서라도 스왑시장 정상화의 길을 터줘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은행들의 태도도 국가별로 차이가 있다. K부장은 "유럽계는 상대적으로 호의적이지만, 미국은행은 외환위기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상업적이고, 달러를 빌려주는데 가장 인색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외화송금거래 업무 등을 미국계 은행에 많이 몰아준 것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며 "앞으론 받은 만큼 혜택을 주는 쪽으로 방향을 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 이틀사이 전쟁 조기 종결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서 시장이 호전기미를 보이고 있으나 아직 낙관하긴 이르다"며 "6월까지는 가봐야 상황이 호전될지, 악화될지 판단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대희기자 dhnam@hk.co.kr
중견기업 자금담당 B부장
중견기업 A사 자금담당 B부장은 요즘 출근할 때마다 머리가 무겁다. 경기침체에 SK글로벌 사태까지 겹쳐 돈줄이 말라 버린 상황에서 기업의 자금조달 임무는 사실상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B부장은 앉자마자 전화기를 잡았다. 이라크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소식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평소 친분 관계를 유지하던 증권사 기업금융 팀 C차장을 통해 회사채 발행 가능성을 타진해본 것. 하지만 돌아온 답은 "기다리라"는 것 뿐이었다.
투자적격 등급 가운데 최하위인 BBB 등급의 A사는 지난달부터 자금압박이 심해지는 바람에 현재 신규 투자가 전부 중단된 상황. 그 동안 확보해놓은 자금으로는 상반기를 간신히 버틸 정도라는 것이 B부장의 자체 판단이다.
조바심이 난 B팀장은 다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주거래 은행과 다음달로 만기가 되는 대출 한 건의 연장 문제를 상의한 후 다른 은행에는 신규 여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해 보았다. 결국 점심도 이 은행 사람하고 먹었다.
기업은행이 2월 중소제조업체 동향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자금사정이 곤란해졌다'고 응답한 업체의 비율은 24.8%를 기록했다. B 부장은 "만약 지금 시점에서 다시 조사를 한다면 절반 이상의 기업이 어렵다고 대답할 것"이라고 말했다.
SK글로벌 사태이후 채권시장 경색으로 기업어음(CP)이나 회사채가 거의 유통되지 않고 있는데다 카드사 부실 문제 등으로 그나마 돈줄 역할을 해온 은행 대출마저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권은 최근 부실 사전예방이라는 명분으로 기업 여신한도를 일제히 축소했다. 내부 보유자금이 풍부하고 회사채도 발행할 수 있는 대기업은 별 문제가 없지만, 은행 여신 비중이 높은 중소기업 들은 초비상이 걸려있다.
B부장은 "은행에는 돈이 넘쳐 나고 있는데도 중소 기업들은 자금 부족으로 쓰러질 판"이라며 "그나마 간간히 대출되는 자금도 일부 기업으로만 편중되는 '자금시장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후 들어 은행 3곳을 쫓아다녔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던 B부장은 사무실로 돌아와 투신권 환매사태로 한달 가까이 돈이 묶여있는 초단기금융상품(MMF) 환매 가능성을 알아봤지만, 여전히 환매가 금지된 상태라는 이야기만 들어야 했다.
B부장은 "자금조달은 물론, 그나마 운영하던 자금까지 묶여서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면서 "금융기관이 우량기업에게만 대출을 하는 몸 사리기를 계속할 경우 앞으로 몇 개월 안에 중소 기업들은 줄줄이 부도를 맞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박천호기자 toto@hk.co.kr
카드사 채권회수팀 L과장
7일 오후 서울 노원구 상계동 A카드사 채권팀 사무실. 130여명의 채권회수 전담 '반장'들이 벌써 몇 시간째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고 있다. "손님, 연체된 사실 아시죠? 현금이 아직 준비가 안 됐으면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1주일 후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이들의 하루 전화 통화건수는 평균 70여건. 오후5시면 전화를 아예 받지 않는 연체자를 만나기 위해 자택이나 사무실을 찾아간다. '지금 강압적으로 회수하려는 모양인데 그대로 녹취해 금융감독원과 언론에 고발하겠다'는 협박도 감내해야 한다. 이 회사 채권팀의 L과장은 "오전 8시 직원조회는 '연체 위기'에서 시작해 '연체 잡기'라는 말로 끝난다"며 "올해 상반기 연체율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카드사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 카드사 채권팀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전쟁 상황이다. 국내 9개 전업카드사는 이미 연체채권을 조기에 회수하기 위해 채권추심 인력을 대폭 보강, 연체율 잡기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삼성카드는 지난해말부터 3월말까지 콜센터와 영업팀 직원 250명을 채권추심인력으로 돌렸고, LG와 우리, 외환카드도 연체채권 관리 인력을 100∼300명 가량 충원했다.
이처럼 카드사들이 연체율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은 카드 연체야말로 카드시장, 나아가 금융시장 위기의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월말 현재 9개 전업 카드사와 16개 은행 겸영 카드의 1개월 이상 전체 연체금액은 무려 12조원을 넘어섰다. 2001년 말 2.5%에 불과하던 연체율은 지난해 말 6.6%로 뛰었고 올해 2월말에는 10.4%로 폭등했다.
높은 연체율은 곧바로 카드사의 경영실적과도 연결됐다.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1조1,082억원의 흑자를 기록한 국내 9개 전업카드사는 하반기 들어 연체율이 급증함에 따라 2,616억원 적자로 마감하고 말았다. 또한 연체율 상승→대손충당금 적립비율 상승→카드사 재무구조 악화→카드사 발행 회사채(카드채) 부실화→채권시장 위기 등의 악순환은 결국 현재의 금융시장 위기를 불러왔다.
더욱이 금감원은 4월부터 자기자본비율이 8%에 미치지 못하거나 연체율이 10%를 넘은 카드사에 대해서는 적기 시정조치를 내린다는 방침이어서 카드사들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다. L과장은 "선발 대형사와 후발 중소형사의 실적 격차는 올 상반기에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며 "연체율을 잡지 못한 카드사는 하반기 구조조정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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