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신수희(59)씨의 푸른색 화면을 들여다 보고 있는 중이었다. 도대체 이 푸른색은 뭘까. 바로 그때 '아득한 회색, 선연한 초록'이란 제목의 책이 배달돼 왔다. 문학평론가 김윤식(67)씨의 막 출간된 학술기행서였다. 푸른색에 망연해 있는데 김씨는 하필 회색이 아득하고 초록이 선연하다니. 책 서문을 읽고서야 김씨가 "나의 친애하는 벗이여, 일체의 이론은 회색이라네. 생명의 황금나무만이 초록인 것을"이라는 괴테의 '파우스트' 중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을 빌어 자신의 수십 년 공부를 회색과 초록으로 풀어내고 있음을 알았다.그러면 신수희 그림의 푸른색은 뭘까. 전쟁이 아직 폐허를 남겨놓았던 1954년 열 살 나이에 서울 자유회관에서 개인전을 열어 미술평론가 이경성씨로부터 천재소녀라는 말을 들었던 아이, 대입 예비고사 전국 여학생 1등에 서울대 총여학생회장을 지냈던 우수생, 대우전자 회장과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배순훈(60·KAIST 교수)씨의 부인이고 정상의 피아니스트 신수정(61)씨의 동생이라는 화려한 가계 등을 모두 차치하고, 그의 푸른색에서 무엇을 볼까 하는 궁금증이다.
"블루는 그냥 나한테 온 것이다. 의도적으로 선택한 게 아니다." 신씨는 코발트, 울트라 마린, 프러시안 블루를 가릴 것 없이 "푸른 색은 체질"이라고 말했다. 갤러리현대에서 9∼23일 여는 6년 만의 국내 개인전에 '미시령―겨울' 연작 등 신씨가 내놓은 그림은 한층 체질화한 그만의 푸른색을 보여준다.
외국 비평가들은 그의 푸른색에서 '존재의 평정과 조화'를 읽기도 하고, 혹자는 '꿈과 몽상의 나라로의 산책'을 보거나 '관능적 세계'의 냄새를 맡기도 하며, 또 다른 이는 모네의 그림 '수련'에서 보는 물결에 비치는 햇빛과 구름을 발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씨의 푸른색은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서예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아버지의 초서 붓놀림은 경쾌한 속도로 흰 종이에 추상화면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것을 찢어서 캔버스에 붙이고 푸른색 물을 들인다. 하지만 이렇게 서너 작품도 만들기 전에 아버지는 가셨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형상, 화면을 흔드는 듯한, 혼돈스러우면서도 시원시원한 붓놀림의 흔적이나 단숨에 그어내린 듯한 붓자국은 자연에 바탕한 서예적 선의 흐름이다. 신씨에 따르면 "동양화의 여백은 흰 종이 위에 선이 그어지는 순간 저절로 창조되는 신비스러운 공간"이다.
그래도 푸른색 자체에 대한 의문은 여전한데 신씨는 시 하나를 들려 준다. "별똥 떠러진 곳,/ 마음해 두었다/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인젠 다 자랐오." 정지용의 시 '별똥'이다. 문학소녀였을 신씨는 "구름이 한껏 붓을 휘두른 하늘"이라는 표현도 했다. 알 듯도 했지만 여전한 미진함,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소용돌이 같기도 하고 푸른 불덩어리 같기도 한 둥그런 푸른색의 덩어리에 대한 의문은 다음 이야기에서 풀렸다. "어릴 적 충주 시골 집 창턱 위로 뜬 둥근 달을 따 달라고 언니에게 조르면 언니는 작은 막대기를 달을 향해 흔들었다. 환갑이 지난 언니에게 좋아하는 시를 그려드리겠다고 하자, 언니는 고려 시인 이규보의 '우물 속의 달'을 골랐다. 나는 둥그렇게 붓을 돌렸다."
스님이 물동이에 퍼 담아 가고 싶었던 고려 우물 속의 달. 아니라 해도 그만이겠지만 '신수희의 푸른색'을 그렇게 봐도 좋겠다 싶다. 신씨는 "초승달은 아니었을까? 언니는 물었지만 나는 단호히 아니라며 더 진한 색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고 덧붙였다.
9일 전시회 개막식에서는 프랑스 문화부가 신씨에게 수여한 '예술·문학 기사 훈장' 전달식도 함께 열린다. (02)734―6111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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