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4월8일 오전 6시30분께 서울 신촌의 와우 시민아파트 한 동이 무너져 30여명이 죽고 40여명이 다치는 참극이 일어났다. 와우 지구(마포구 창전동 산2번지)에는 그 전해 12월26일 5층 아파트 16개 동이 들어섰다. 착공한 지 6개월 만이었다. 이 가운데 제15동이 준공한 지 4개월도 안 돼 무너져내린 것이다. 30가구가 살게 돼 있던 제15동에는 당시 15가구 70여명만 입주해 있었다. 입주자의 반이 이 사고로 목숨을 잃은 셈인데, 만약에 서른 가구가 모두 입주한 뒤에 아파트가 무너졌다면, 희생자의 규모는 훨씬 더 커졌을 터였다.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은 당시 대통령 박정희와 서울시장 김현옥이 야심차게 추진한 시민아파트 건설이 시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부실의 속도전(速度戰)이었다는 것을 끔찍한 방식으로 드러냈다. 이 아파트가 세워졌을 때의 마포구청장 김옥현은 아파트가 무너지기 이틀 전에 퇴직했지만, 사고가 터지자 곧바로 구속되었다. 시공업자와 마포구청의 몇몇 공무원들도 같은 처지가 됐다. '불도저 시장'이라고 불리던 김현옥은 4월16일자로 경질되고 그 후임에 경북도지사로 있던 양택식이 임명됐다. 양택식에게 시장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서 박정희는 시민 아파트 계획을 백지화하라고 지시했다.
와우 아파트가 무너진 뒤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화약 더미가 폭발하고 다리가 무너지고 고층 건물이 내려앉고 지하철이 불구덩이로 변하는 끔찍한 사고들이 이어졌다. 그 뒤의 재난들이 하도 크고 참혹했던 터라 33년 전 오늘의 아파트 붕괴는 별스러워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별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진정 별스럽게 대했다면, 그 별스러움을 뼈아프게 마음에 새겼다면, 그 이후의 재난을 줄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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