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도 없던 시절, 미군 부대와 그 부속 건물들은 한국인이 미국 문화와 직접 대면할 수 있었던 유일의 공간이었다. 미국을 알고 싶어 할수록, 미국에 닿는 길은 먼 곳에 있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미군의 군납품에 대한 수요로 나타났다.미군 PX에 엄청나게 쌓여 있던 미국 상품은 대부분이 미군과 군속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실수요자는 그 물건들에 맛을 들인 한국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일하던 한국인 종업원들이 군납품을 조금씩 빼돌려 시장에 내놓았던 것이다. 그곳에는 공식 미국 문화에서 담배와 술 등을 거쳐 마약까지, 하여튼 모든 게 세계적이었다.
미 8군의 연예 사업은 미국 본토의 것과 같이 맞물려 돌아 갔다. 농경 문화의 사회에서 지구적이고 현대적인 문명을 접할 수 있던 당시 유일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미군에 연예 무대를 납품하던 사람은 캘리포니아나 라스베이거스의 민간 연예 단체였다. 민간 기업들이 군대를 상대로 군납업을 하는 것과 꼭 같은 이치다. 물론, 본토의 엔터테인먼트사는 미국의 쇼 상품을 갖고 해외 주둔 지역으로 가 흥행할 수도 있었지만 경비와 유지비 등의 이유로 한국 사람에게 맡겼다.
그러나 본국의 엔터테인먼트사들은 주둔지 연예인들의 오디션장을 꼭꼭 챙겼다. 그들의 '품질 관리'였던 셈이다. 심사위원단 앞줄에는 본국에서 파견된 전문 인력이 자리했고 그 뒤에 군 당국자들이 배석, 본토의 시각이 우선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당시 국내의 오디션이라면 가수건 코미디언이건 각각 단품(單品)만을 심사하고 뽑는 것이었으나, 미 8군의 오디션은 쇼 프로그램 전체를 다 뽑았다. 그들에겐 스타보다 하나의 잘 짜여진 상품으로서의 무대가 더 필요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국 것보다 나았다손 치더라도, 무대 시설은 지금 눈으로 보자면 말도 아니었다. 당시 내가 제일 신경 쓰였던 게 감전 사고다. 미군 무대는 모두 임시 무대여서 눅눅한 날이면 마이크에 입술이 닿을 때마다 통증이 일어 깜짝깜짝 놀랐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 현상은 내가 유독 심했다. 전기 기타가 중간에서 바닥과 마이크를 연결해주는 도체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 같은 현상은 시설이 허술했던 2사단(문산·판문점)과 7사단(동두천) 전방 지역에서 더 심했다.
사실 당시 국내의 일반 무대에서는 그런 사고가 날 턱도 없었다. 무엇보다 전기를 쓰는 악기란 막 선을 보이던 쓰던 전기 기타를 제외하곤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금속과 관련된 악기라면 전기와는 무관한 브라스 악기뿐이었다. 우리 쇼단의 경우에는 전기 기타, 조명 기구, 전자 장비에다 여타 악기와 쇼걸들의 의상 등 기본 장비만으로도 0.5∼1톤은 됐다.
그밖의 음향 기기는 클럽에 있던 것을 끌어다 썼다. 당시 키보드는 없었다. 그래서 클럽안에 있던 피아노를 써야 할 판국이었으나, 음정이 엉망이어서 쓸 수가 없었다. 고육지책으로 내 기타가 피아노 역할까지 맡은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도입했던 게 전자 올갠이다.
1960년대 중반 우리가 썼던 '파피샤 올갠'이나 '야마하 전자 하몬드 올갠' 등 아날로그 양식을 썼던 국내의 1세대 키보드는 1970년대 이르러 신디사이저로 대체됐다. 악기는 당시 막 번창기로 접어 들고 있던 종로 낙원상가에서 고가로 빌리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우리 팀은 개인적으로 하나씩 사서 갖고 다녔다. 그만큼 월급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곳에 출연하던 다른 한국인 연예인들은 미군 당국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서울 근교 부대의 경우는 한국 연예인들에게 식사가 제공되지 않았으나, 후방 부대에는 뷔페식이 제공됐다. 문제는 일부 여자 단원들에게서 나왔다.
닥터 페퍼 등 시중에서 볼 수 없는 먹거리나 예쁜 냅킨 같은 것들이 나오면, 그들은 몰래 핸드백에 넣어 챙겼다. 이 일이 부대측에 알려지면서 이후에는 식사를 잘 안주는 등 대우가 나빠지기도 했다. 한국 종업원들이 미군측에 고해 바쳤던 것이다. 이럴 경우 식사가 잘 안 나오거나, 다음 공연 스케줄이 잘 잡히지 않는 등의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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