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병안의 국회 통과를 보면서, 무람없게도 소설 장면을 떠올린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이다.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번만이다.> 주인공은 여인을 두고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꼭 한 번만 자기기만과 무책임을 용서하기로 다짐한다. 그러나 주인공과 독자는 그 마지막은 결코 마지막이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순간의 거짓을 받아들이면 긴 안락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경험은 알기 때문이다. 동시에 마음 한쪽은 삶이 끊임없이 기만과 위선으로 이어진다는 죄책감으로 쓰리다. 나는>
베트남전 파병의 쓴 교훈
남루한 삶이라도 증언하는 작가가 있듯이, 전쟁에도 목격자가 있다. 어떤 것도 그물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 파병의 역사는 베트남전 이래 40년이나 되었다. 이번 이라크 전선으로는 공병부대와 의료단만 떠난다. 비전투 부대라 우선 다행이다. 그러나 베트남에도 처음에는 의료진 130명, 태권도 교관 10명만 보냈다. 나중에는 31만 명으로 늘어나 4,900여명이 전사했다.
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은 미국의 요구 때문이었고, 근거는 1953년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미국의 파병 요청계획은 그 다음 해부터 시작되었다. 제네바협정을 계기로 인도차이나 지역에 파견요청을 고려했으나, 실행은 9년 뒤나 이루어졌다.
베트남 파병과 관련해서 새겨둘 것이 있다. 이삼성 가톨릭대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미국이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끌어들인 것은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도화하는 과정이었다. 파병은 또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과 유신독재를 정당화한 과정이기도 했다.
베트남 파병을 거치며 잃은 것은 민족의 자주성과 인권이고, 얻은 것은 경제력일 것이다. 거칠게 분석할 때 베트남전 특수에 힘 입어 방위산업 중심의 경제발전이 있었고, 그것이 또 중동진출의 발판이 되고 부(富)축적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경제성장의 뿌리는 이렇듯 미국과의 교류확대와 군사 동맹관계, 베트남 파병에 닿아 있다.
전쟁은 인간성부터 파괴시킨다. 한국군 사령관들은 "100명의 적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신조"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베트남 빈 둥 마을 사람들은 "한국군은 총소리 한 방만 들어도 인근 주민 90명을 죽인다"고 증언한 바 있다. 미국학자 노엄 촘스키는 한국군에 희생자가 생기면 양민을 상대로 잔인하게 보복함으로써, 베트콩이 감히 한국군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고 지적한다.
이것이 우리 부와 국익의 뒤틀리고 누추한 뒷모습이다. 우리의 영양가 많고 따스한 밥상에는 국제적 오명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미국과의 역사적 밀약으로 경제특혜를 입은 우리의 딜레마다. 미국을 이제 와서 외면하고 파병반대를 외치는 것이 합당한가. 파병에 반대하려면 특혜도 거부했어야 하지 않을까. 혜택에는 침묵하면서 파병 앞에서 인권주의자가 되는 것이 바른 선택인가 하는 쓰라린 자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정의도 명분도 없는 전쟁에 눈감고 국익만 좇아 파병에 찬성하는 것은 이성적인가. 어느 쪽도 기만일 듯하다. 한미관계는 북핵 등 한반도 안전과 직결되는 점에서 더 난해하다. 그나마 이번 뜨거운 파병논란이 역사에 대한 국민적 성찰의 계기가 된 것 같아 다행스럽다.
'마지막 타협안' 되기를
우리는 '무진기행' 처럼 타협안을 낸 셈이다. 하지만 소설처럼 이번이 '마지막' 파병이라는 간곡한 다짐이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다짐이 한낱 위선이 되지 않도록, 왜곡된 국제관계를 바로 펴고 실현 가능한 한반도 평화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거셌던 반전과 파병반대의 외침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파병의 굳은 연결고리에서 마침내 벗어나야 한다.
박 래 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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