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를 졸업하고 군복무 대신 무의촌 근무를 하게 되었을 때 선유도라는 서해바다의 아름다운 섬에서 근무하게 된 것은 나에게 행운이었다. 도시에서는 해가 뜨는지 지는지도 모르고 살았지만, 섬에서는 매일 해가 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고, 밤에는 바닷가에 홀로 나가 밤하늘을 보면서 100억년도 넘었다는 우주를 느낄 수 있었다.내가 평생 볼 수 없었던 어촌의 생활을 맘껏 구경하기도 했다. 정월에는 배마다 오색 깃발을 달고 풍어제를 지내는 광경을 보기도 하고, 정월 대보름날에는 지신밟기를 하며 돌아다니는 것도 신명나는 구경거리였다.
그러던 중 보건지소에서 100m 가량밖에 떨어지지 않은 집에 사는 62세 된 이씨 아주머니가 굿을 한다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나는 호기심이 발동해 카메라를 들고 찾아갔다. 이씨 아주머니는 지난 몇 달 동안 삭신이 쑤시고, 식욕이 없고, 잠이 오지 않아서 점을 쳐본 결과 시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고, 굿을 하면 나을 거라는 점괘가 나왔고, 아들 내외가 굿을 하기로 해서 이웃 비안도에 사는 무당 부부를 불러왔던 것이다.
나는 선유도를 비롯한 10여 개의 섬의 건강문제를 책임진 유일한 의사였다. 아직도 질병치료를 미신에 의지하려는 비과학적인 행위를 근절시키고 계몽해야 할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사연을 들어보니 이씨 아주머니는 정신 이상이었던 시어머니 밑에서 평생 고달픈 시집살이를 하였다고 했다. 고깃배를 사서 일하던 남편은 수년 전 빚에 쪼들려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으며 설상가상으로 귀여운 막내 아들도 병으로 잃었다고 했다. 또 다른 아들은 결혼해서 육지에 나가서 살고 있어, 아주머니는 하루 하루를 섬에서 외롭게 버티며 살고 있었다. 병이 어디에 있는지 굳이 말해야 한다면 신체나 정신의 병이라기 보다는 일생 전체가 앓고 있다고 말해야 할 지경이었다.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던 아들 내외와 손자들이 육지에서 찾아오고 이씨를 잘 아는 마을 사람들까지 모인 가운데 굿판이 벌어졌다. 무당은 우선 조상 귀신과 부엌 귀신들을 모시고 달래는 굿으로 시작했고, 굿판이 달구어지자 죽은 남편을 불러냈다. 무당이 남편 노릇을 하는 가운데, 이씨 아주머니는 죽은 남편에게 신세 한탄을 모두 할 수 있었고, 급기야는 그래도 살아남은 자신이 손자도 보고 행복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징소리와 장구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나중에는 무당과 이씨 아주머니는 신나게 춤까지 추게 되었다. 사이 사이 동네 사람들이 이씨 아주머니를 위로해 주는 가운데 이씨 아주머니는 그동안 응어리진 인생의 슬픔과 고통을 풀어냈다. 나는 밤새워 굿을 지켜보면서 굿이 왜 이렇게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도 존속해 오는지를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물론 무당이 질병을 치료하진 못한다. 하지만 나는 아픈 인생을 치유하는 무당의 신명과 위안은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서울백병원 가정의학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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