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김영삼 정부는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것을 추진한 바 있다. 그 결과로 전두환, 노태우라는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됐다. 그리고 이들이 구속되는 날 언론들은 일제히 우리 헌정 사상 가장 불행한 날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헌정을 파괴하고 광주의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한 독재자들이 뒤늦게나마 법의 심판을 받은 이날은 헌정 사상 가장 불행한 날이 아니라 가장 다행스러운 날이었다.노무현 대통령은 국회연설을 하고 파병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한 지난 2일 "취임 후 최악의 날"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언론은 전했다. 이 같은 소식을 접하면서, 거센 반대로 두 차례나 미루어졌던 파병안이 통과됨으로써 자신에게 정치적 승리를 안겨준 날을 최악의 날이라고 말한 것을 보니 역시 노 대통령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노 대통령이 한미동맹 등 현실적 여건 때문에 할 수 없이 파병 결정을 내렸지만 그래도 정당하지 않은 전쟁에 우리의 청년들을 보내야 하는 것에 가책을 느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노 대통령이 안쓰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더욱이 한 장애자가 인터넷신문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어떤 부부 장애인이 월 60만원의 생계보조금에 의지해 살면서도 대선에서 노 대통령의 희망돼지에 15만원을 냈는데, 이번 파병 결정에 실망해 후원금을 돌려 달라는 글을 이날 청와대 신문고에 올렸다고 한다. 최악의 날이라는 말이 나올만한 정황이다.
그러나 언론보도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노 대통령이 최악의 날이라고 말한 까닭은 엉뚱하게도 국정연설에서 KBS사장 인선파동과 관련해 "인선에 개입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오늘 보니 거짓말한 것 같아 낯이 뜨겁다"는 등 사과의 뜻을 밝혀야 했고 그날 저녁에 있었던 KBS노조위원장 등과의 대화해결 노력도 실패한 데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KBS사태는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나 KBS사태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인 파병 때문이 아니라 KBS사태 때문에 그날이 최악의 날이라고 노 대통령이 생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노 대통령을 이해하려 했던 마음은 오히려 실망감으로 변하고 말았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노 대통령의 최대 매력, 그리고 공헌은 참여정부라는 명칭에 걸맞게 대통령이 과거의 권위주의적인 행태를 벗어나 국민들과 진지하게 대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온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검사들과 가졌던 텔레비전 생중계 토론이다. 이번 KBS 문제도 문제가 커지자 노 대통령이 직접 노조위원장과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을 만나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실상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었다.
그러나 검찰, KBS사태보다 중요한 문제이자 훨씬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킨 파병에 대해서는 노 대통령이 직접 반대세력을 만나 이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설득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고작 한 것이라고는 유인태 정무수석에게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을 만나 이에 대해 논의하라는 지시였다.
노 대통령 자신이 나서지 않은 이 같은 대화노력은 당연히 시민사회단체의 거부로 좌초되고 말았다. 특히 직접 대화를 회피하는 이유와 관련해, 노 대통령이 이 문제를 놓고 토론을 할 경우 "내가 질 수도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져 이길 수 있는 대화만 하는 것이 참여정부냐는 비판이 생겨났다.
파병안은 이미 통과됐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분노하고 있는 이유가 파병안도 파병안이지만 노 대통령이 유독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참여정부라는 말이 무색하게 국민 여론을 수렴하고 반대세력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