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표경기가 감기증세를 보일 때는 체감경기는 이미 독감에 걸려있기 십상이다. 경기 침체가 가속화하면서 내수에 의존하는 업체들 사이에서는 '외환위기보다 상황이 어렵다'는 아우성이 거침없이 터져 나오고 있다. 올들어 계속 감소세를 보이는 매출은 최근 이라크전과 사스 공포가 겹치면서 두자리 수 이상 곤두박질 치고 있고, 이에 따른 기업들의 투자축소 및 긴축경영 바람은 더욱 경기하강을 부채질 하는 악순환이 빚어지고 있다. 경기 침체를 가장 실감하는 중소제조업체와 유통업체, 여행업체의 관계자들로부터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편집자주
중소기업
"외환위기 때보다 더하다는 소리가 빈말이 아닙니다. 그땐 나아질 희망이 있었죠. 지금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란 불안감에 잠을 설칩니다."
부산 사상공단에 위치한 BM금속의 서병문(徐丙文·60·사진) 사장은 요즘 내수위축의 수준을 "1974년 유가파동이후 최악"이라는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이 회사는 냉장고, 자동차, 중장비 등에 쓰이는 각종 정밀 금속 주조 제품을 생산해 국내 기업에 공급하는 중견기업. 지난해 매출은 450억원으로 삼성, 대우, 현대 등 대기업 납품을 주로 해 수요 기반이 탄탄한 업체로 정평이 나있다.
그러나 이곳에도 내수침체의 찬바람은 매서웠다. 서 사장은 "회사의 주요 생산품 중 하나인 중장비 부품의 경우 매출이 40%나 줄었다"며 "그나마 건실하다는 우리 회사가 이 정도면 다른 업체들의 상황은 짐작하기조차 두렵다"고 말했다.
국내 주물금속업체의 수는 500여개. 연간 2조원 규모의 작지 않은 시장이지만 올해는 15% 이상의 매출감소를 예상하고 있다. 기계류, 생산 설비의 내수가 전체적으로 감소한데다 대기업들이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면서 현지 부품 공급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서 사장은 "원자재 및 물류비가 최근 10% 넘게 오르면서 대기업이 원하는 수준으로 단가를 무작정 낮춰 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거래 물량을 외국업체에 뺏기고 있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이미 1·4분기에 불어닥친 내수 침체로 업체 둘 중 하나는 적자 상태로 알려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업체들의 설비 가동률도 밑바닥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만 해도 정상치(80%)에 가깝던 설비가동률이 지난달에는 69%대로 급락했다. "우리 회사만 해도 생산 라인 3개 중 1개는 쉬고 있는 상황"이라는 서 사장은 "노사간에 뼈를 깎는 원가 절감 노력으로 버티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30년 넘게 기업경영을 해왔다는 서 사장은 투자 실종이 내수 침체의 주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대기업들이 사상 최대의 흑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전, 북핵 위기 등으로 기업의 투자 심리가 크게 위축된 데다 기술·설비 투자마저 국내보다는 중국과 동남아등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 "덩달아 외국인 투자까지 빠져나가고 있으니 경제가 바람 빠진 축구공처럼 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 서 사장의 탄식이다.
/정철환기자 plomat@hk.co.kr
사진 손용석기자
유 통
"3월 매출 실적을 집계하면서, '어떻게 이런 수치가 나올 수 있나' 눈을 의심한 유통업 관계자들이 많았습니다."
할인매장 강남킴스클럽 점장인 유응천(劉應天·46·사진) 이사는 현재 유통업계 경기는 1998년 외환위기 직후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말한다. 백화점의 경우 외환위기 직후에도 한 달에 10% 이상 매출이 감소한 적이 없었지만 지난달에는 대다수 백화점들이 전년 동월 대비 30% 이상 매출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할인매장의 경우 오히려 매출이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지난달 할인점 매출은 전년 동월 대비 평균 10% 가량 감소했습니다." 쇼핑객 숫자가 줄어든 데다, 고객 한명 당 매출단가(객단가)도 5,000원 이상 떨어졌다.
유 이사는 지난해 경쟁적으로 설립된 수도권 지역의 할인매장의 경우 매출감소가 더 심하다고 말한다.
쇼핑행태 역시 전형적인 불황패턴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불황 때 증가하는 돼지고기 소비가 점차 늘다가, '돼지 콜레라' 파동 이후에는 닭고기 소비가 늘고 있다. 또 립스틱, 넥타이 등 멋내기를 최소화하는 '불황기 아이템' 의 매출도 증가 추세다.
연중무휴 24시간 영업을 하는 킴스클럽의 경우 평소 심야시간대 객단가가 높다. 음식점 등을 경영하는 자영업자들이 한꺼번에 몰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들어 심야시간대 객단가도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유 이사는 "불황이 실물경제 말초신경에까지 깊게 퍼지고 있다는 신호"라고 해석한다.
유통업계의 유례없는 불황은 경기침체 외에도 유통업계의 과잉투자가 한 몫을 하고 있다. "사실 불황의 조짐은 백화점의 경우 지난해 가을부터, 할인점 등은 올해 초부터 뚜렷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수도권과 지방도시에 우후죽순 늘어난 대형 쇼핑센터들이 출혈 가격인하 경쟁을 벌이면서 부실을 키워왔습니다."
"연말쯤 되어야 경기 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겠냐"는 유 이사는 "그때까지 각종 경비 50% 절감 등 비상경영으로 견뎌내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기간을 견디지 못한 유통업체들은 연쇄도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며, 또 한번 유통업계 재편이 벌어질 것 같다는 으스스한 전망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정영오기자 young5@hk.co.kr
사진 원유헌기자
여 행
"융단폭격을 당한 것 같습니다. 업계 전체가 초토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이라크 전쟁과 그에 따른 테러 위험, 경기침체의 후폭풍에 이어 이번엔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의 직격탄을 맞은 여행업계는 개점휴업 상태다. 사스가 최초로 창궐한 중국과 급속히 전염되고 있는 동남아시아, 일본 등은 국내 아웃바운드 여행사(국내 관광객을 해외로 내보내는 여행사)의 매출 중 7할을 창출하는 곳이지만 3월 중순부터는 이 지역을 찾는 관광객이 아예 사라졌다. 동남아 지역의 경우 예년에 비하면 70∼80%까지 여행객이 감소한 상태.
국내 유일의 코스닥 등록 여행업체인 하나투어 박상환(朴相煥·46·사진) 사장은 "외환위기를 거치며 회사의 체질을 혁신한 덕에 지금의 위기를 그나마 견디고 있다"며 "2·4분기까지는 '헛장사'를 각오했다"고 털어놨다.
하나투어는 사스가 창궐하기 전까지만 해도 초고속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1, 2월 매출은 지난해 동기에 비해 각각 60%씩 늘어났다. 그러나 3월 매출은 당초 목표의 70%선으로 추락했고, 4월 매출은 3월의 절반에도 못 미칠 것으로 박 사장은 내다봤다. 매월 해외여행객 2만5,000여명을 내보내다 3월 중순부터는 9,000명 선을 채우기도 버거워진 것.
그래도 하나투어와 같은 초대형 여행사의 사정은 나은 편이다. 박 사장은 "광고비 부담으로 평소에도 이익을 못내던 중소업체들은 줄도산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재무사정이 탄탄한 중견업체들 중에서도 직원 절반을 무급휴가 보내거나, 격일 근무제를 실시하는 곳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이달 들어서는 직원들에게 월급 줄 돈을 마련할 수 없다고 토로하는 사장들도 많아졌다고 박 사장은 귀띔했다. 10대 대형여행사 가운데 5개사가 부도를 맞았고, 나머지 회사들도 전직원의 70∼80%를 해고했던 1998년 외환위기의 악몽이 군소업체들에게 다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업계 차원에서는 별다른 대책을 마련할 수 없어 더욱 답답합니다. 그러나 1∼2주내에 어느 나라에서건 치료제를 개발해주면 희망은 있습니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4월중 사스가 사라져 5월 황금연휴기를 살리는 것입니다."
매년 내국인의 해외관광 수요가 30% 이상 증가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성수기인 3·4분기 전에 사스가 진정되면 '밑지는 장사'는 면한다는 것이 그의 계산이다. 박 사장은 "길게 보면 사스는 작은 시련이고, 이번 위기를 계기로 회사를 더 단단히 다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태훈기자 oneway@hk.co.kr
사진 배우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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