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8군 무대의 시절은 치열한 음악적 탐색의 시기였다. 잡음 반 음악 반이었던 AFKN AM 라디오에서 나오는 최신 음악을 한 소절이라도 놓칠세라 밤새워 군용 녹음기에 릴 테이프로 복사해 관심이 가는 곡은 듣고 또 들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괜찮은 곡을 1주일에 한 곡 정도는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곤 방, 사무실, 창고, 밴드 연습실 등 어디서건 기타를 치며 그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 눈 붙이는 시간이라곤 고작 너댓 시간이었다. 그 과정을 거쳐 내가 무대에서 선보였던 곡이 부대 내 쥬크 박스(동전을 넣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계)에서 연주되는 것은 빨라야 한달 뒤가 보통이었다. 미군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지사.한창 나이로 보자면 말도 안 되는 수면량이었지만 소시적부터 워낙 힘들게 살아 온 터라 그까짓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밤을 새 가며 나는 파트별로 편곡해 필사 악보에 새까맣게 편곡했고, 덕분에 우리 쇼단은 매일 최신곡을 연습한 셈이다. 따라서 무대에서의 레퍼터리는 나날이 달랐다. 우리가 인기 최고로 떠오른 것은 당연했다. 그것은 열이면 열, 각기 수준이 달랐던 클럽을 다 만족시켜야 했던 내가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대응책이었다. 이처럼 청중을 의식하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했던 것은, 훗날 나의 작곡 사무실에서 가수를 키울 때 각각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아 훈련시키는 작업으로 연결된 셈이다.
월급도 제법 받겠다, 음악을 위해서라면 귀한 돈이 들어가도 그때는 아깝지 않았다. AFKN 녹음용 릴 테이프는 시중에 나가 미군 물건 파는 데서 샀는데, 대단한 귀중품이었으나 돈만 있으면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던 전후, 대체 누가 그런 물건에 관심이나 뒀겠는가. 나는 당시 중상(中上) 정도의 수준은 유지하고 있었다. 미 8군에서 근무하는 한국인이 받을 수 있었던 최고 수준의 개런티였다. 게다가 먹거리 하나는 풍족했으니, 그것도 현실적 이유가 됐으리라. 식사할 때는 식판에 담아 먹었는데 빵과 음료수가 주 메뉴였다. 음료수는 콜라, 우유, 맥주가 번갈아 나왔고, 특별 메뉴로 프라이드 치킨 등 육류가 나오기도 했다.
미군 클럽은 식당 홀, 쇼 홀, 게임 홀 등 세 곳으로 이뤄져 있다. 우리 멤버들이 게임 홀에서 당구 탁구 카지노(잭팟) 핀볼 따위를 하며 시간을 보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클럽 오락실에 한국인들이 와서 게임을 할 경우에는 한국인이나 미국 관리인들이 종업원을 시켜 "나가 달라"며 노골적으로 요구할 때가 비일비재했던 것이 현실이었는데, 우리는 대단한 특별 대우를 받았던 셈이다. 당시 기지촌을 둘러싼 풍경은 사실 착잡한 구석이 한둘 아니다. 거기서 정상적 문화가 제대로 작동되던 곳이라곤 철조망 안, 부대 내 클럽뿐이었다. 부대 담장 밖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사창가나 술집 등 관리와 통제 밖의 세계였다. 지금은 번화가로 변한 이태원도 미군 부대가 들어설 때는 허허벌판이었다.
한국의 별천지, 미 8군 무대는 좋게 말하면 음악적 정체성이 강했던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비틀스의 'I Wanna Hold Your Hand'가 빌보드 차트에 1위를 해도 별 의미가 없었다. 가장 미국적인 노래, 즉 컨트리 뮤직 또는 그것이 록으로 발전한 캘리포니아(또는 웨스트 코스트) 록을 뭣보다 듣고 싶어 했다. 그들의 민속 음악을 록과 결합한 힐리빌리나 라커빌리도 좋아했다. 바꿔 말하면 거기는 그들의 향수를 달래줄 수 있는, 가장 미국적 음악만이 살아 남는 곳이었다.
미군 부대 생활에서 느낀 바를 근거로 단언컨대, 미국인들은 세계가 이라크전을 아무리 반대해도 자신들의 뜻을 끝까지 관철시킬 것이다. 미국은 자기네 문화가 침범 받는 상황을 절대 용납하지 못 한다. 미군 부대에서 본 미국인들은 보수적이었다. 그것은 역사가 짧았던 만큼, 오히려 자기 문화의 우월성에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게다가 세계 제1의 강대국이라는 고집까지 겹쳤으니, 이 전쟁에서 미국은 적어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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