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간직했던 나만의 꿈을 찾아 나선다.'두 살 연상의 아내와 신혼의 단꿈을 즐기고 있는 신희석(26)씨는 남들이 곤히 잠들어 있을 새벽 5시면 집을 나선다. 신씨의 직장은 호텔이나 백화점에 고기를 납품하는 정육 도매업체인 아름유통(주). 신씨는 전날 도축한 돼지고기를 칼로 뼈와 살을 분류해 포장 박스에 담는 일을 맡고 있다. 위생복을 입고 있어 오전만 되면 신씨의 옷은 도축 돼지에서 나온 핏물과 신씨의 땀으로 범벅이 된다.
부산 태생인 정미라(35)씨는 사내 최고참(?) 노처녀다. 경희여상과 경성대를 중퇴한 정씨는 현재 회사에서 경리 파트를 맡고 있다. 하지만 정씨는 과외로 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정씨가 다니는 회사는 캐주얼 의상을 만드는 중소 의류 업체. 정씨는 이 회사에서 디자인한 여성 의류 신상품이 시중에 출시하기 전에 먼저 입어보는 비공식 사내 모델 일도 겸하고 있다. 정씨가 의류회사를 고집한 것도 오랜 꿈인 모델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직장을 다니는 김희정(23)씨는 학원생들 사이에서 '분위기 띄우는 엽기 선생님'으로 통한다. 어학원에서 상담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는 김씨는 타고난 신체적 특성과 주체할 수 없는 '끼'로 학원 내에서 최고 인기 선생님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김씨는 어릴 때부터 큰 키에 깡마른 체격, 작은 얼굴을 가져 '소말리아'라는 별명을 달고 다녔다. 지금도 174㎝, 50㎏의 체격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고등학교 때부터 익힌 '막춤' 실력 또한 수준급이라 주위에서 모델 권유를 많이 받는다.
우리 사회의 평범한 샐러리맨인 이들 세 사람은 요즘 누구 보다 행복하다. 자신들의 꿈을 펼쳐볼 변신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최근 한 이벤트사가 주관한 'TV홈쇼핑 모델 선발대회'에 출연, 당당히 입상의 영광을 안았다. 하루하루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평범한 직장 생활에서 벗어나 마음속에서만 그려왔던 꿈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신희석씨는 이번에 선발된 모델 중 유일한 남성이다. 신씨가 대회에 나선 것은 다름아닌 아내와 처형의 강력한 추천 때문이었다. 한양공고를 나온 신씨는 그간 케이블회사 안테나 설치공사, 건설사 상수도 공사 등 주로 육체노동을 많이 하는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해 왔다. 그러나 좋은 신체조건(188㎝, 80㎏)을 아깝게 여긴 아내가 나서 대회 신청서 작성은 물론, 의상과 메이크업 코디까지 했다.
신씨는 "솔직히 (모델에 대한) 마음은 있었지만 가장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그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매일 돼지고기를 썰던 사람이 갑자기 화려한 의상에 화장까지 하니까 처음엔 '이래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제 기회가 주어진다면 후회 없이 해볼 생각입니다. 하지만 완전히 자리를 잡기 까지는 본업에 충실할 생각입니다"라고 말했다.
30대 중반에 여성 모델로 나선 정미라씨는 "그 동안 숨겨져 있던 내면의 욕망을 펼쳐보자는 생각에서 용기를 냈다"며 "주위에서 '나이가 많은 것 아니냐'고 묻지만 나이에 대한 콤플렉스는 없다"고 말했다. 선발대회 본선에서 참가자중 유일하게 과감한 속옷 패션을 선보여 심사 위원들을 놀라게 했던 정씨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지만 단지 실천하지 못할 뿐"이라며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에 옮기느냐 못하느냐가 삶의 질을 바꾼다"고 설명했다.
인터넷 카페 관리가 취미인 신세대 직장인 김희정씨는 학원 상담실에서 인기를 끌었던 노하우를 '끼'로 연결 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모델 지원에 나섰다. "학원 상담역의 임무는 학생들을 등록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상담 온 학생을 친구나 누나 입장에서 대합니다. 취미를 묻고 여자 친구 이야기를 하고, 그러면 자연히 마음도 열리게 됩니다. 상대방을 편하게 하는 것, 그것이 모델의 기본이 아닐까요"라고 반문했다.
세 사람은 요즘 낮에는 직장을 다니며 주말에 빈 시간을 이용해 틈틈이 모델 수업을 받고 있다. 이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에 서는 새로운 꿈과 희망이 생겨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했다. 화려한 변신을 꿈꾸는 그들의 눈은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송영웅기자 hero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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