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습사이렌이 울려퍼지는 2차대전 나치하의 파리. 여성들은 아침마다 종아 리 뒤쪽에 검정잉크로 곧은 일직선을 긋는데 열중했다. 심각한 물자부족으 로 스타킹 조차 사기 어렵던 시대이지만 패션리더들은 검정 잉크선에 기대 스타킹을 신은듯한 연출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전쟁의 광기도 패션에 대한 열망을 죽이지는 못했다. 전쟁의 역사는 곧 패션의 역사이기도 하다. 전쟁과 패션은 ‘기존 질서의 파괴를 통해 새로운 질서의 탄생을 모색한다’는 역설을 공유한다. 실제로 1,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 걸프전에 이르는 20세기 주요전쟁은 그 원인 이 무엇이든 기성 질서를 전복시킴으로서 인류의 가치관, 생활양식을 변화 시키는 중요한 이정표 노릇을 했으며 패션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 었다. 까닭에 이라크 전쟁의 개전 이후 패션계의 화두는 ‘과연 이 전쟁이 21세 기 초엽 패션트렌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다. 삼성패션연구소 이유순 수석은 “이라크 전쟁 발발을 전후해 21세기 들어 대세를 이뤘던 화려하고 낭만적인 에스닉(민속풍) 무드가 한풀 꺾이고 갑작스럽게 갑옷이 나 군복 디테일 등 밀리터리가 급부상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올 봄 열린 파리나 밀라노 등의 03/04 추동컬렉션에서는 고전적인 스타일을 고수하는 샤넬이나 루이비통 같은 명품 브랜들조차 금속장식을 잔뜩 붙인 갑옷스타일을 선보여 시선을 끌었다. 국내서도 SR앤진, 데얼스 등 내셔널브랜드가 반전티셔츠를 판매, 이라크전 에 쏟아지는 관심을 엿보게 했다. 또 지난 3일 막을 내린 서울컬렉션위크 에서는 패션쇼장에서 하얀색 비둘기를 날려보내는 등 반전 평화의 메시지 를 주창하며 밀리터리룩을 선보이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시선을 끌어모았다 . 이라크전을 계기로 새롭게 보여지는 밀리터리룩은 기존의 커다란 아웃포켓 과 어깨견장의 응용, 카고팬츠와 카무플라주 패턴 등 전형적인 스타일에서 한발 더 나아가 복고적인 트렌드를 반영하면서 보다 강력한 이미지를 담았 다. 한편 홍익대 섬유예술학과 금기숙 교수는 “최근 유행 소재로 떠오른 자글 자글 구겨진 느낌의 원단이나 올이 풀리고 찢어진 느낌의 디자인 등이 더 많이 사용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런 소재는 때가 타고 구겨져도 그대 로 입어야 하는 전쟁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약간 지저분한 듯한 느낌 이 더 트렌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을 반영한다는 분석이다. 그럼 이라크 전쟁 이후의 패션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이 수석은 두가지의 시나리오를 가정한다. 첫째 미국이 승전할 경우는 세계 강대국으로 군림하 는 미국의 미니멀리즘 문화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패션은 더욱 실 용화, 캐주얼화할 것이다. 반면 미국이 패전하거나 전쟁이 오래 끌면 미국 의 영향권은 약화되는 반면, 중동의 에스닉 문화가 다시 힘을 얻으면서 패 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한다. 전쟁의 향방이 어느쪽으로 갈리든 간에 ‘일상을 뒤흔들어놓는 가장 극단 적인 사건’으로서의 전쟁은 패션의 색채는 물론 스타일에 까지 심오한 영 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금기숙 교수는 “오늘날 밀리터리룩을 말할 때 빼놓지않고 등장하는 ‘카 키’라는 용어부터가 전쟁의 산물이다. 카키는 흔히 국방색으로 알고있지 만 19세기 말 대영제국이 인도를 점령할 때 군인들이 입은 베이지색 군복 이 먼지처럼 뿌옇게 보인다는 의미에서 힌두어로 ‘먼지’를 뜻하는 카키 라고 불렸다가 아얘 전문 색채용어로 정착한 것처럼 이번 전쟁은 또다른 색상의 밀리터리 칼라를 가져다줄 수 도 있다”고 말한다. 스타일에 미칠 영향도 관심거리다. 이유순 수석은 “20세기를 대변하는 전 쟁들이 터질 때마다 패션도 극적인 변화를 거쳤다”면서 샤넬스타일로 대 변되는 1차대전 후의 플래퍼룩, 2차대전 당시의 유틸리티패션과 전후 크리 스찬 디오르의 뉴룩, 베트남전의 히피스타일과 걸프전이 낳은 스타 디자이 너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소프트 에스닉룩 등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이라크전에서는 소프트 에스닉에서 한 발 더 나아간 파워 에스 닉룩이라도 나올 것인가. 패션관계자들은 에스닉 무드가 힘을 얻더라도 세 계적인 경기침체와 이라크 전쟁이 맞물리면서 21세기 초입의 낙관적이고 화려한 에스닉의 부활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으로 일단 점치고 있다.◇플래퍼스타일: 무릎선의 짧은 치마길이와 로우 웨이스트, 이마를 살짝 가리는 크로쉬햇을 쓴 활동적이고 보이시한 매력의 스타일. 가브리엘 샤넬이 대표적인 디자이너로 샤넬은 이 스타일의 창조를 통해 여성의 몸을 코르셋에서 해방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유틸리티패션: 전시 나치치하의 유럽은 심각한 물자부족으로 식 량은 물론 옷감도 배급제를 실시했다. 나치정권은 옷감부족을 타개하기위 한 고육지책으로 이른바 ‘유틸리티 드레스’ 권장사업을 벌였다. 장식을 일체 배제한 실용적이며 견고한 투피스 스타일. 나치의 주도아래 파리에서 유틸리티패션쇼에 소개되기도 했는데 당시 이 패션쇼에 주축으로 참가한 발렌시아가나 랑방 등은 후에 나치에 협력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뉴룩: 1947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파리에서 크리스찬 디오르는 ‘뉴룩’을 발표, 전세계를 충격과 열광으로 몰아넣었다. 좁고 둥근 어깨 선과 부풀려진 가슴, 꽉 조인 허리선과 패드를 넣어 풍성해진 치마 등 A라 인의 뉴룩은 샤넬이 벗겨냈던 코르셋을 여성들에게 다시 입혔지만 전쟁으 로 피폐하고 삭막해진 여성들을 위로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각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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