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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무안군 현경면 수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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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무안군 현경면 수양리

입력
2003.04.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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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푸진 햇살에 들판도 그새 벌겋게 익고 있다. 그 볕이 아까운 농부들은 봄 배추 심느라 이미 밭으로 나갔을 터. 마실 나온 동네 개들만 볕을 쬐고 앉은, 전남 무안군 현경면 수양마을 회관 앞. 현경면 면장과 수양마을 이장을 비롯한 마을 임원들이 마주섰다. 웬일일까. 이네들의 표정은 봄볕 같지가 않다."허가 난 일에사 관여 안헐랑게 알아서 하씨오. 허지만서두 우리 마을 밭흙은 한 삽도 안되니 어디 두고 보겄소." 이장 고송자(53·여) 씨의 다지름에, 초도순시 나온 면장이 쩔쩔 맨다. 연전 보습곶이 앞 바다에 양식장 허가를 낸 외지인이 최근 밭 흙을 퍼다가 물막이 공사를 벌일 움직임을 보이자 주민들이 막아선 것. 밭을 샀다지만 그 흙까지 마음대로 퍼내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밭은 제 밭일 지 몰러도 흙이고 땅이야 마을 재산 아니겄소. 법으로도 그건 아니라고 헙디다." 새마을지도자 임정심(49·여)씨도 거든다. 면장은 "원리원칙대로 허겄다"는 다짐을 내놓고 서둘러 마을을 떠났다.

산은 커녕 둔덕도 하나 없어 전남 도내에서도 면적대비 경지 면적이 으뜸이라는 무안군. 거기서도 현경면 수양리라면 5, 6월 양파 마늘 수확철마다 나주 목포 등지의 품일 원정대가 몰려와 적잖은 규모의 인력시장이 서는 땅심 센 마을이다.

땅심 만큼이나 완고한 마을 원로들이 올해 초 마을의 제일 윗자리인 이장 자리를 여성에게 내맡기는, 유사이래 초유의 모험을 감행했다. 단독 추천 무선거 당선. 원로들은 "하는 짐에 다해 보소"하며, 3부 요직인 개발위원장과 새마을지도자도 여성으로 천거했다. 거기에는 '어디 얼마나 잘하나 두고보자'는 생뚱스런 마음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수양리 이장단은 당연직 여성보직인 부녀회장에다 1,2반 반장까지 보란 듯이 여자들로 선출, 명실공히 6인 임원 '여인천하'를 출범시켰다.

원래 여자 목소리가 센 마을이냐고 묻자 "농사지음서 여자가 행세하는 동네 봤소?"하고 되묻는다. 누대 남정네들의 '무시'가 징그러워, 뭉치고 뭉치다 보니 마을 부녀회가 세졌고, 그 파워와 수완을 원로들도 무시하기 힘들게 됐다는 것.

지난 해 '절임배추'가 압권이었다. "배추가 실하게 여물어도 제 값을 못받고, 아에 밭에서 썩어나갈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지라." 고심 끝에 고 이장이 낸 아이디어가 배추를 절여 소비자 직거래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초벌 가공으로 배추 부피도 줄이고, 주부들의 일손도 덜어주자는 차별화 전략이었던 것. 지난 해 중간수집상에게 밭떼기로 넘긴 김장배추 한 통 가격이 500원. 부녀회는 당시 소비자가격(2,000∼2,500원)보다 싼 2,000원에 절임배추 직거래에 나섰다. 밭 주인이 1,000원을 갖고, 나머지 1,000원은 공동작업장 경비로 갹출. "절임배추 소문이 나면서 주문이 몰려드는디 감당을 못하겄습디다." 부녀회원들은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작업장에서 신바람을 냈고, 물량이 달려 주문을 자르기도 했다.

고 이장이 '여간내기가 아니다'는 마을 어른들의 수근거림은 그가 30대였던 1988년 '고추파동'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근당 2,000∼3,000원씩 하던 고추 값이 하루 아침에 200∼300원으로 폭락했고, 주민들이 들고 일어선 것. 농협 조합이 좋은 값에 수매해 주겠다고 했으나 고 이장과 마을 부녀회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농협이 제 값에 이 많은 양을 수매하믄 조합이 거덜날 판이었어. 조합이 망하믄 누구 손핸디? 그려서 군청 도청 다니며 정부서 수매하라고 으르고 달래고 매달렸제. 남자들이야 체면 때문에 씨게 못나서거등." 그 해 수확한 고추를 근당 2,000원에 정부가 전량 수매해 준 곳은 무안군 뿐일 것이라고 했다. 당시 늦깍이 대학생으로 농민운동을 거들던 이 마을 박진우(41) 씨는 군의원에 당선돼 고 이장의 든든한 '빽'이 돼 있고, 고 이장은 내친 김에 전국여성농민회 운동에 가담, 96년부터 2000년까지 내리 5년을 전국여농 회장을 맡는다.

배추나 마늘을 수확한 뒤 밭을 덮었던 비닐은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공터에서 꼬실라불고(태워버리고)' 언덕배기에다 '버려불고'했다. 그 폐비닐 수거작업을 시작한 것도 부녀회였다. 폐비닐이 무겁기 때문에 옮기려면 경운기 모는 남자들의 조력이 필요했고, 남편들은 여자들의 부탁에 뭔 구접스런 짓이냐며 다리를 걸기도 했다. "여그가 밭이 많고, 시설농사를 많이 헝게 비니루가 좀 많어? 시퍼 보여도 1년 모았더니 도 보조금까지 쳐서 한 500만원 돈 됩디다." 그 돈도 전액 부녀회 기금으로 모였다.

급기야 얼마 전 150여명이 모인 마을 총회에서 남자 회원들이 '떼'를 쓰고 나왔다. 폐비닐 수거사업을 남자들에게 넘기라는 것이었다. 마을회관 보수 등 돈 드는 일이 생기더라도 일일이 이장과 부녀회에 손을 벌려야 하는 게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판 표결 결과 논리에서 일방적으로 밀린 남자들에 대한 동정표가 쏠렸던지 1표 차이로 '이양'쪽으로 기울었다. 고 이장은 "나도 투표했으믄 좋았을 거인디 사회보니라 못헌 게 안타깝다"며 웃었다.

이장단은 올해 또 하나의 '개혁'을 준비중이다. 조합 대의원도 여성으로 뽑겠다는 것. 마을 단위로 각 1명인 임기 2년의 대의원은 임기 4년의 조합 이사 선거가 겹치는 해에만 경합하고, 선거가 없는 기간에는 모두들 시큰둥한 '이변'이 반복되고 있다. '30만원짜리 봉투 돌리면 떨어지고 50만원 넣어 돌리면 붙는다'는, 남자라면 누구나 안다는, 돈선거 때문이다. "조합 이사가 농민들에게는 얼매나 중요한 자린디…. 남자들에게 맡겨놓으면 다 썩어 부러. 개혁이 안되겄어."

여성 임원체제 출범 초기 '뒷말'하는 남자들도 적지 않았고 비협조적인 마을 원로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대세'를 따르고 있는 듯했다. 군 고위관계자도 "고 이장이 여성이어서도 그렇지만, 워낙 열성적이고 농정에도 '빠꼼이'라서 대하기가 훨씬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이장이 연루될 만한 이권이라는 게 밭떼기 거간꾼 상대나 퇴비 등 농사용품 일괄구매 등 고만고만한 것들이지만, 고 이장은 뒷말이 있을 성 싶은 일에는 늘 동생 같은 새마을지도자나 한 살 위 형님인 개발위원장 등과 동행한다. 봄 배추 밭갈이에 한창이던 마을 한 어른은 "거그가 전국적으로 회장도 하고 말도 여간 잘 안허요. 여자 이장 나온 뒤로 마을 방송도 곰살맞게 자주 해주고 회의도 많아서 참 좋소"라고 했다.

고 이장에게는 하지만 고민도 많다. "무안 마늘이 한 해 1,000억짜리 농산디 중국산 수입개방 땜시 힘들어 죽겄소. 허지만 정부와 싸우고 또 싸우더라도 마늘농사는 포기 못허요. 대체작목, 말이야 명주고름이지만 모두 배추 심고 양파 심으면 그 농사는 또 어쩔라요." 비닐하우스 시설채소를 많이 짓다 보니 마을 65가구 중 조합 빚 없는 집이 별로 없고 그 역시 부채가 2억5,000만원이라고 했다. 그는 다행히 수해 덜 입고 그냥 저냥 소득이 나와 조만간 갚을 깜냥이 섰다고 했지만 아직 조합 빚이 버거운 가구도 더러 있다. "워떠케든 마을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 '빚 없는 마을'을 만들어 볼 참이요. 하다보믄 잘 안 되겄소."

24살 되던 해 고향 신안을 떠나 무안 땅으로 꽃잠 자러 들어온 지 30년. 고구마 농사를 시작으로 마늘, 양파에 이르기까지 줄곧 수입산에 밀리며 땅과 보대끼는 동안 그는 배운 게 있다고 했다. "국민핵교 배끼 안나온 나 겉은 사람들도 모여서 머리 맞대믄 배운 사람들 만큼 못 헐게 없소. 하믄 여자도 남자만큼 못 헐 게 뭐 있겄소."

/무안 글·사진=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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