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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번역어 성립 사정

입력
2003.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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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부 아키라 지음·서혜영 옮김 일빛 발행·1만원하루에도 수십 번 입에 올리는 '사회(社會)'라는 말은 글자대로 풀어보면 그냥 '모인다'는 뜻이다. '모일 사(社)에 모을 회(會)'니까. 글자만 놓고 봐서는 영어의 'Society'에 대응하는 이 말에서 어떤 속뜻이나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불과 100여 전 일본인이 영어나 프랑스, 네덜란드어 등 하여튼 'Society'에 대응하는 유럽어를 옮기기 위해 만든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굳이 근본을 말한다면 '사회'는 'Society'라는 유럽적 현상을 담은 말이라고 해야 한다. 이런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본 오사카(大阪)의 모모야마가쿠인(桃山學院) 대학에서 비교문화론을 가르치는 야나부 아키라(柳父章)는 일찍이 번역 문제에 주목한 사람이다. 80년대 초반을 전후해 '번역의 논리' '번역의 사상' 등을 출간하고 일본어 번역 관련 글을 여러 곳에 발표했다. 이 책은 자신이 쓴 번역 관련 논문 가운데 중요한 단어 11개를 골라 서양어가 일본어로 옮겨지게 된 과정을 대중이 읽기 쉽도록 추적해 놓은 것이다.

야나부에 따르면 'Society'는 일본어로 번역하기가 매우 힘든 단어이다. 개인을 단위로 하는 인간 집합을 뜻하는 'Society'에 대응하는 현실이 당시 일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행정 단위나 지역 조직을 뜻하는 '구니(國)' '한(藩)' 같은 말은 있었지만 거기에서 개인은 신분으로만 존재했다. 그래서 19세기 초중반 일본의 유럽어 사전은 이 말을 대개 모임이나 동료 등의 좁은 의미로만 옮겼다.

그러다가 1847년에 나온 '에이카지텐(英華字典)'에서 '회(會)와 결사(結社)'로 옮기며 처음으로 '사'와 '회'가 함께 등장한다. '사'는 메이지(明治) 시기 이전부터도 일본에서 '일정한 목적을 지닌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했기 때문에 대개 이 자전이 나온 시기를 전후해 'Society'는 '사의 모임'이라는 뜻을 담아 '사회'로 정착했다.

'연애'라는 말도 일본에는 원래 없었다. '색(色)'이나 '연(戀)'이라는 말과 구별되는 '고상한 감정'을 가리키는 'Love'의 번역어 '연애' 역시 1870년께 처음 나왔다. 그밖에 '개인' '근대' '미' '존재' '자연' '권리' '자유' '그·그녀' 등의 말도 에도(江戶·1603∼1867)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1868∼1912) 시대에 걸쳐 번역을 위해 만든 신조어이거나 그에 가까운 말이다.

책에서 다룬 번역어 중 '사회' '개인' '근대' '미' '연애' '존재'는 일본에 없던 말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말들은 일본에서 쓰인 역사가 있고 일상어로 있으면서 번역어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은 말들이다. 저자는 특히 후자의 경우 의미 혼란이 일어나 번역에 문제를 드러낸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연애'는 현실 속에 살아 있는 의미가 아니라, 현실 밖에 서서 일본의 현실을 재단하는 규범이 되어 갔으며 이것이 일본에서 번역어가 걸어가는 숙명"이라고 꼬집었다.

우리가 의심의 여지도 없이 한국어로 생각하고 사용하는 말 가운데 많은 것들이 근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번역어이다. 야나부 교수가 지적하는 일본의 번역어 문제는 이른바 '번역 기술'의 문제와는 전혀 질이 다르며, 일본 뿐 아니라 바로 한국이 안고 있는 '근대'와 '사상'의 문제일 수 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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