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봄 이탈리아 북부의 고도 볼로냐는 전세계에서 몰려든 어린이책 출판 관계자들로 붐빈다. 어린이책 박람회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 된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때문이다. 올해로 40회를 맞은 이 행사는 세계 어린이책의 흐름을 한 눈에 보여주고 저작권 계약 상담이 이뤄지는 거대 견본 시장으로도 유명하다. 2일 개막, 5일까지 열리는 올 도서전에는 주최국 이탈리아를 포함한 62개국 1,100개 출판사가 참가, 지난해(67개국, 1,350개)보다 약간 줄었다. 세계 경기 침체와 이라크전의 여파이다. 축제처럼 술렁대던 예년과 달리 분위기도 착 가라앉았다는 게 참가자들의 말이다.그러나 전시 전용면적만 1만7,700㎡에 이르는 드넓은 박람회장 안에서 책과 카탈로그가 잔뜩 든 무거운 가방을 들고 수백 개의 부스를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는 관람객들의 모습에서는 여전한 열기를 느낄 수 있다. 전세계 어린이책 출판 관계자들이 거의 다 모이다시피 한 이 때를 이용해 얼굴을 익히고 계약 상담을 하려는 약속이 30분 단위로 하루 8시간씩 이어지는 게 보통이다.
한국은 올해 처음 국가관을 설치했다. 80㎡ 면적의 한국관에는 대한출판문화협회를 포함해 8개 출판사가 참여하고 있다. 또 길벗어린이, 재미마주, 교원 등 9개 출판사는 한국관 밖에 단독 부스를 설치했다. 4, 5년 전만 해도 한국 부스가 많아야 서너 개이던 데 비하면 크게 늘어난 셈이다. 해마다 수백 명씩 몰려와 판권 경쟁을 벌이며 입도선매식 싹쓸이로 눈총을 받던 행태도 올해는 많이 사라졌다. 그보다는 우리 책도 이제 외국에 팔 수 있을 만큼 좋아졌다는 자신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상담에 나서는 모습이다.
이런 변화에 대해 10년 넘게 볼로냐에 다닌 초방의 신경숙 대표는 "드디어 희망이 보인다"고 말했다.
참가 규모나 자세 뿐 아니라 전시된 책의 수준에서 한국 어린이책의 성장과 잠재력이 뚜렷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외국인의 관심은 주로 한국적 소재와 미감이 두드러진 그림책에 쏠리고 있다.
한국관의 최고 인기 품목은 음악교재용 악기 생산업체 색동이 선보인 재활용 악기 '종이 오카리나'이다. 요구르트 병 등에 종이 마우스피스를 붙이기만 하면 아름다운 오카리나 소리를 내는 이 신기한 악기를 방문객마다 불어 보고, 만드는 법과 연주법을 설명한 책을 살피고 간다.
볼로냐 아동도서전은 전세계 신진 일러스트레이터의 등용문이기도 하다. 매년 2,000명 이상의 작가가 응모, 선정된 작가들의 작품을 박람회장 입구 중앙 홀에 전시한다. 올해는 픽션 부문에서 85명, 논픽션 부문에서 41명이 선정됐는데 한국 작가로 픽션 부문에서 조재영, 조은수씨가 포함됐다.
조은수씨의 '말하는 나무'(문학동네 발행)는 자유분방하고 파격적인 선과 색채가 인상적이고, 조재영씨의 '고향 이야기'(초록배매직스 발행)는 채색 수묵화를 연상케 하는 기법으로 한국의 전통적 감수성을 전하고 있다. 그 동안 볼로냐가 선택한 한국 국적의 일러스트레이터는 '노란 우산'(재미마주 발행)의 류재수씨를 비롯한 4명이 있다. 이 책은 볼로냐를 발판으로 미국에 수출돼 지난해 뉴욕타임스 '최고의 그림책'에 선정되기도 했다.
일러스트레이션 부문 올해의 초청국가는 폴란드다. 폴란드는 오랜 전통의 일러스트레이션 강국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도 뉴욕과 파리의 어린이책은 폴란드계 작가들이 주도한다. 폴란드 전시장은 저마다 다양한 실험과 독특한 개성이 돋보이는 일러스트레이터 47명의 작품으로 자랑스럽게 관객을 맞고 있다.
/볼로냐=글·사진 오미환기자 mhoh@hk.co.kr
■프랑스가 픽션·논픽션부문 최고 영예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의 최고 영예는 라가치(Ragazzi·어린이) 상이다. 픽션과 논픽션, 그리고 개발도상국에 주는 상으로 2000년 신설된 '새로운 지평상'등 3개 부문이 있다.
올해의 픽션, 논픽션 부문은 프랑스가 가져 갔다. 갈리마르 출판사의 '스타일 연습'(픽션)은 레몽 케노 원작의 아주 짧은 이야기를 60여 명의 일러스트레이터가 99개의 서로 다른 버전으로 표현한 매우 독특한 책으로, 그림과 편집에서 환상적인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망고출판사의 '장 물랭'(논픽션)은 2차 대전 중 프랑스 레지스탕스 이야기를 사진과 그림, 콜라주를 다양하게 활용해 정교한 시각 디자인으로 엮고 있다.
'새로운 지평상' 수상작은 이란의 어린이 청소년 지능개발 연구소가 펴낸 '일화'로, 페르시아 옛이야기라는 전통적 소재와 현대적 기법의 그림이 조화를 이룬 멋진 책이다. 라가치 상 외에 1997년부터 시행 중인 '뉴 미디어'상은 디지털 세대 어린이를 위한 멀티미디어 출판물이 대상인데 올해는 독일 스웨덴 미국이 받았다.
볼로냐 도서전은 전통적으로 유럽이 주도해 왔다. 유일 초강대국 미국도 여기서는 주류에 끼지 못한다. 출품 도서의 그림만 봐도 디즈니식 만화 감각이 두드러지는 미국 책과 달리 대부분 예술성과 상상력으로 승부를 거는 것들이다.
그러나 최근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 출판 선진국의 책이 소재나 감수성에서 점차 바닥을 드러내며 매너리즘에 빠지는 경향을 보이면서 동구나 중동 지역의 책이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체코나 슬로베니아는 그들만의 독특한 감성을 잘 살린 아름답고 환상적인 그림책으로 볼로냐에 모인 세계인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있다.
/볼로냐=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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