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산공단에서 자동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두손병원(경기 안산시 선부1동)에는 손가락이 잘린 환자들이 모여든다. 대개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던 중 다친 산재 환자들이다. 잘린 손가락을 한마디라도 더 살려주는 이곳이 그들에겐 '최후의 보루'다. '손가락 공장장' 황종익(48) 원장이 있기 때문이다.황 원장은 끼니 때울 짬도 없이 수술실과 진료실을 오가는 날이 많다. 팔이나 다리가 동강이 나 헬기로 긴급히 실려온 응급환자 수술이라도 하고나면 다음날로 모든 수술스케줄이 밀려버리기 때문이다. 하루 평균 5건의 수술을 하지만 이같은 응급수술은 한달에 두세번씩 닥친다.
황 원장은 성형외과 의사다. 그러나 얼굴을 고치는 미용성형이 아니라 국내에서 흔치 않은 재건성형으로 그중 손가락 성형 전문이다. 공장에서 작업 중에, 혹은 농사를 짓다가 아차하는 순간 기계에 말려들어가 으스러지고 잘린 손들이 그의 손을 거쳐간다. '의사'지만 그는 자신의 환자들과 "3D업종에 종사한다"는 공통점을 내세운다. 몇 시간씩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직경 1㎜도 안 되는 미세한 혈관을 이어 붙여 손가락을 접합하고, 밤늦게라도 응급환자가 생기면 수술대로 불려 나와야 하는 이 일은 의료계의 대표적 '3D업종'이란다. 두손병원으로 연수를 나온 수련의들도 두어 달이 지나면 포기하기 일쑤다.
그는 돈벌이가 되는 미용성형을 택한 동료들과 다른 길을 걷는 이유를 "체력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짤막하게 답했다. 미세수술이 국내에 도입된 지 얼마되지 않은 수련의 시절, 고난도의 테크닉을 요하는 데다 밤을 새우기 일쑤이다 보니 체력이 좋은 자신이 도맡게 됐다고 한다.
황 원장은 대학병원의 교수직처럼 보다 편한 자리 대신 일반 병원들이 달가워하지 않는 산재환자들과 15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도 "특별한 사명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연이었을 뿐"이라고 겸손해 한다. 1989년 수련의를 마친 그의 첫 직장이 광명병원이었다. 구로공단 가까이에 있다보니 산재환자들이 밀어닥쳤다. 재직한 5년동안 1,800여개의 손가락을 붙였다. 전체 환자의 3분의 1이 안산공단 노동자였다. 그는 94년 안산에 국내 처음으로 수부외과를 차렸다.
그동안 변화도 많았다. 처음엔 손가락 하나 붙이는데 5시간이 걸렸지만 15년이 지난 지금은 길어야 2시간이다. 손가락 하나 접합하고 받는 수입도 12만원에서 63만원으로 늘었다. 병원도 수술실 4개, 침상 115개를 갖추는 등 커졌다. 두손병원은 국내 노동현장의 변화를 포착할 수 있는 현장이다. 80년대엔 플라스틱사출기에 다쳐 손가락 정도만 잘려나간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젠 자동차제조사 등 중공업 분야로 중심이 이동하면서 수백톤의 프레스에 팔이나 다리까지 잃은 노동자가 많아졌다. 외국인 노동자가 전체 환자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고향주소를 남겨둔 외국인 환자들이 많아서 은퇴 후 해외여행은 걱정 없다"는 그는 무슬림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정도다. 외국인노동자들과 그만큼 친숙하다는 얘기다. 불법체류자들도 상당수지만 산재처리에는 큰 문제가 없다.
2002년 한해동안 절단 사고를 당한 노동자는 3,563명. 황 원장은 "손가락 한마디라도 더 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환자와 가족들을 볼 때 마다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이 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손가락을 조금만 더 살려내도 생활하는데 훨씬 덜 불편하지만 치료기관이 없어서 절단하는 경우가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94년 개업 당시 간판도 걸지 못한 상황에서 열 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간 레미콘트럭운전사를 수술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절박한 산재 환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게 다행스러울 뿐"이라고 말했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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