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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문화코드]<7>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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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문화코드]<7> 판타지

입력
2003.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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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이라는 두 이야기와 함께 열렸다. 검은 안경을 쓴 조그만 소년과 반지를 놓고 싸우는 괴상한 종족들이 전세계에 준 충격은 예상을 뛰어 넘었다. 두 이야기는 '판타지'라는, 21세기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문화코드를 거목으로 키웠다.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는 전세계 55개 언어로 번역돼 1억9,200만 부가 팔렸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는 1, 2편 합쳐 국내에서만 8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반지의 제왕'도 마찬가지다. 책은 한국에서만 100만 부 이상 팔렸으며,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은 800만 명이 넘었다. '해리 포터'의 작가 조앤 K 롤링은 2002년 영국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번 여성으로 꼽혔다. 그는 책 출판과 흥행 수입에 힘입어 4,800만 파운드(약 930억원)를 벌어들였다. '반지의 제왕'의 작가 JRR 톨킨이 살아 있다면 롤링에 못지않은 거금을 쥘 수 있었을 것이다. 수많은 환상적 이야기가 뒤따라 나왔지만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이라는 거대한 판타지의 두 기둥은 더욱 견고해졌다. 시리즈로 제작되는 영화가 한 편씩 나올 때마다 힘을 더해 간다. 사실 21세기에 '판타지'라는 코드는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의 다른 이름인 셈이다.왜 판타지인가

판타지 소설은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 세계의 이야기를 독특한 형식으로 풀어낸 소설이다. 판타지 장르는 서구 유럽의 민족 설화에 바탕을 두었던 것이, 1950년대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나오면서 정형이 만들어졌다. 왕국과 부족이 싸우고 마법과 변신술이 등장하는 것이 판타지 소설의 기본 구도가 됐다. 사실 이런 구도는 낯선 것은 아니다. 모든 판타지는 원탁의 기사들이 신검과 성배를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 젊은 영웅이 마법사의 도움을 얻어 불을 뿜는 용으로부터 공주를 구해낸다는 등의 이른바 '영웅 전설'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

그런 옛날식 얘기가 왜 새로운 세기에 판타지 열풍을 불러 일으키는가. 전문가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영상에 경도된 세대를 흡인하는 힘을 꼽는다. 영화와 만화, 애니메이션, 컴퓨터 게임 등에 심취하고, 실제 현실과 가상 현실을 넘나드는 신세대의 감수성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장은수씨는 "판타지 소설은 이미지에 민감한 새로운 세대에게 놀라운 상상력을 불어넣었다"면서 "그것이 기존의 도식화한 상상력이 아니라 스스로 개발하고 진화하는 상상력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 판타지 장르 중에서도 유달리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이 독보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두 작품의 서사 구조에 각별히 주목한다. 톨킨은 '반지의 제왕'에서 '중간계'라는 상상의 세계를 창조했다. 3만7,000년에 이르는 역사를 가진 이 방대한 세계는 출간 이후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와 삽화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평론가 김종엽씨는 "톨킨은 '반지의 제왕'에서 '중간계'라는 지극히 독창적인,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다. 여기에 평범한 사유를 뛰어넘는 넒은 시야를 보여줬다 "고 평한다. 인간을 우주의 한 종족으로 설정한 폭 넓은 세계관이 '주인공이 모험을 통해 성숙해진다'는 단순한 구성을 넘는 큰 의미를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반지의 제왕'에 비하면 '해리 포터'는 좀 단순해 보인다. 철학자 김용석씨는 그러나 소년이 어른이 되어가는 마법학교 생활기를 담은 이 소설에서 계급결정론이라는 보수적 시각을 읽는다. 김씨는 마법학교가 사실은 혈통을 따지는 영국의 명문 기숙사 학교의 변형이라는 것, 해리의 여자친구 헤르미온느가 성실하게 마법을 공부해도 해리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 등을 짚는다. 두 작품 모두 이렇게 풍성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판타지물보다도 힘을 갖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판타지는 다양하게 변주된다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의 영화화는 단순히 소설을 영화로 만든 데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매체의 경계를 넘어서는, 어떤 미디어로도 즐길 수 있는 공통 콘텐츠가 됐다. 두 작품의 파급효과는 이미 오래 전에 출판 시장을 넘어 섰다. '해리 포터' DVD는 국내에서 20만 장 이상이 팔렸으며, 컴퓨터 게임은 전세계적으로 900만 개가 팔려나갔다. 소설과 영화의 캐릭터는 문구와 장난감 등에 사용됐다. '반지의 제왕'의 DVD와 컴퓨터 게임도 큰 수익을 올렸다. 원작을 다양하게 변주하는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use)'의 전형인 셈이다.

영화 게임 캐릭터 디자인 등 영상을 바탕으로 한 문화산업이 주목을 받게 되자 출판 산업은 내리막길을 걷는 것처럼 여겨졌다. 영상문화에 소비자를 빼앗길 것이란 단순한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분위기가 달라졌다. 모든 영상문화는 원전(原典)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원전, 즉 '원 소스(one source)'는 당연히 책이 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으로 확인됐다.

또 하나의 파급효과는 마술 열풍이다. 마법을 부리는 해리 포터에 반해 마술을 '실기하는' 신세대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대학로, 신촌 등 곳곳에 '마술 카페'가 잇따라 생겨났다. 신세대 마술사로 불리는 이은결의 팬클럽은 회원이 4만 명에 이른다. 인터넷에 부는 마술 바람도 뜨겁다. 다음(www.daum.net)의 마술학교 회원은 10만 명을 훌쩍 넘는다. 코리아닷컴(www.korea.com)이 개설한 '마술 따라잡기'는 마술사 정성모씨의 104가지 마술 비법을 공개한 것이다. 하루 평균 2만 페이지뷰를 기록하고 있다는 게 코리아닷컴의 설명이다. 하나포스닷컴(www.hanafos.com)이 지난해 12월 개최한 '매직 콘서트'에는 700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뤘다. 상상의 세계를 현실로 옮기려는 욕망이 분출한 것이다. '판타지'를 21세기 문화코드로 자리매김하는 데 이렇듯 다양한 변주가 커다란 몫을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이종도기자 ecri@hk.co.kr

■ 국내 판타지 시장

소설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2편씩 4편이 개봉돼 국내에서만 1,6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소설 판매부수는 550만부에 이르는 등 거대한 시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열광적 판타지 소비가 콘텐츠 생산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1994년부터 발행된 이우혁의 '퇴마록'이 800만 부, 1998년부터 출간한 이영도의 '드래곤라자'가 110만 부가 판매되면서 한 때 판타지 소설 붐이 불었다. 그러나 이영도 이후 주목할만한 작가가 나오지 못하면서 침체 국면을 맞았다. 황금가지 등 주요 판타지 전문 출판사와 인터넷 서점이 제정한 판타지 문학상은 중단되거나 중단을 예정하고 있다.

황금가지는 판타지 출판시장을 키우기 위해 2000년에 제정한 황금드래곤문학상을 2년 만에 중단했다. 황금가지 자음과모음 청어람 등 판타지 전문 출판사는 최근 서구 고전 판타지 소개에 주력하면서 분위기 조성을 꾀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서영채씨는 "국내 판타지는 아직 걸음마 수준으로 '고양이 학교'나 '고리골' 등 일부 작품을 제외하고는 작품성과 대중성 양면에서 제대로 성숙하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그는 "판타지 마니아가 급증하고 전문적 식견을 갖춘 작가군이 출현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판타지 소비자들이 판타지 생산자로 교체되는 데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영화계도 사정은 비슷하다. 지난해 80억원 이상을 쏟아 부은 판타지 영화 '아 유 레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등 대형 판타지 영화가 흥행 참패를 기록함에 따라 판타지라는 새로운 장르 개척은 고사하고 시장 전체가 급격하게 위축됐다.

한국 판타지 영화는 멜로와 SF 무협 등 다채로운 실험을 거쳤지만 1996년 제작된 판타지 멜로물 '은행나무침대' 성공 이후 '무사' 정도를 제외하고는 '귀천도' '천사몽' '비천무' '단적비연수' 등이 잇따라 실패해 다양성과 작품성 양면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상태다. 제작 중이거나 개봉 대기 중인 판타지 영화는 '천년호' '청풍명월' '무영검' 등 주로 무협물에 국한돼 있다. 최근 개봉한 '지구를 지켜라'는 개성적 소재와 시각의 판타지라는 평을 들었다.

영화평론가 김정룡씨는 "국내 판타지 영화는 독창적 시나리오, 컴퓨터 그래픽 인력, 자본 등 판타지 영화의 핵심이 모두 부족해 답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종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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